어린이들에게 우리는 정말로 친절한 세상을 마주하게끔 노력하고 있는지
지난 5월 5일, 군 전역을 하고 민간인이 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후배들과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라멘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기에 데리고 갔다. 그릇이 바닥을 보일 정도로 싹싹 비워내는 걸 보니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나 보다. 카페는 취향을 맞추기 편한데, 맛집은 꽤나 어렵다. 내 입맛이 고급도 아니거니와 맛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기에
식사를 마치고 나면 항상 가야 할 곳이 있다. 그윽한 향과 산미기 어우러지는 그곳. 최근에 내가 애정 하는 카페라는 공간. 한 후배의 추천으로 모 카페에 가게 되었는데, 입구에는 떡하니 <노 키즈 존>이라 쓰여있다. 5월 5일에 노 키즈 카페에 오다니.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노 키즈 존 - 4학년 이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된 글을 보면 항상 들어가는데 망설임이 생긴다. 업주의 자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차별의 첫 단계이고 <노 키즈 존>이 만연되는 순간 얼마든지 다른 No - Zone이 생길 수 있다. 업주의 자유라고 하는 순간 다른 이들의 출입을 막을 수 있는 기준이 생긴다는 점이다. 명백한 차별이기에 인권위에서도 '아동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영업의 자유보다 앞선다'라고 한 적이 있다.
노 키즈 존에 반대하는 이들은 종종 대안으로 노 배드 패런츠 존을 이야기한다. 나도 한때는 몰상식한 부모의 잘못이 크다 생각했다. 어린이는 그럴 수 있어도 부모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나 노 배드 패런츠 존은 결국 공공장소에서 날뛰는 어린이가 있을 때 '어린이에게 쏘아붙일 것이냐', '부모(대부분 엄마)'에게 쏘아붙일 것이냐의 차이다. 이는 공공장소에서 어린이의 날뜀은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와도 같다.
어린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가르쳐야 하고 미숙한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옛적에 아해놈, 애녀석 등으로 낮춰 불렀는데, 그러지 말고 존중을 담아 부르자며 어른을 지칭하는 표현(늙은이, 젊은이)과 비슷한 어린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O린이라는 표현은 이런 취지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본다.
단순히 재미로 쓰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며, 그 대체어가 너무나도 많다. 누군가에게 내 글은 프로 불편러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불편함을 이야기해야만 바뀔 수 있는 세상이니까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싫은 말을 해야만 한다.
어린이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면 공공장소에서 적극적으로 웰컴키즈를 해야 한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배워지는 예의범절은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기에 단순히 이론상으로 배우는 교육보다 오래간다. 특히 어린이의 위치인지능력은 뇌과학적으로 미숙하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단계이기에 올바른 교육이 필요하다.
물론 이론상 교육도 필요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어른의 편의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어른의 눈높이로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사랑'에 어린이에 대한 존중은 존재했는가? 되묻고 싶다. 어린이에게 나라를 이끌어갈 역군, 미래 인재라는 어깨의 짐만 짊어지게 하고 그에 상응하는 혜택은 주어진 적이 있는가? 어린이도 한 사람으로 대우한 적은 있는가? 어린이에게도 품위가 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수능을 보는 고3들에게 부담을 주는 기사들도 정말 싫어한다.)
O린이라는 표현이 밈(meme)화되자, 모든 콘텐츠 속에는 O린이라는 표현이 남발되었다. 헬린이, 런린이, 요린이, 주린이 등이 나타났다. 이 표현의 문제점은 어린이라는 표현이 격식표현이자 존중의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조어 방식이 '미숙하다, 적다, 서툴다'만 강조된 표현이라는 점이다. 어린이가 지닌 다양한 의미 중 서툴고 미숙한 존재라는 점만 강조되었기에 잘못된 표현이다. 미디어 속 잘못된 표현은 어린이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케터라면, 이런 표현 하나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하지 않을까?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보다 친절했으면 좋겠다. 아직 작은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은 얼마나 커 보일까. 어른들의 요구에 걸맞게 자라야 해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착하다는 말속에 착한 아이로 자라기 위해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절하지 못해 마음속 한 편에 멍울이 지는 어린이도 있다.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내게, 한 선배가 '미리 어른이 돼버려서 좋지 않은 점은 없었니?'라는 질문의 속뜻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아이답게 크는 게 좋다는 걸. 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시기가 필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가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친절함이 필요하다.
특히 어린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제공되는 것들이 일반인에게 큰 수혜를 주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전동칫솔은 원래 개발 목적이 장애인이나 손을 잘 못 쓰는 어린이를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제품군이 다양해지면서 일반인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베리어프리, 유니버설 디자인은 사람을 향한다. 사람을 향한 일들의 혜택은 소수에서 다수로 넘어간다.
그 답은 오늘의 어른이 어떤 세상을 가꾸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 어린이라는 세계 중
어쩌면 당신이나, 제게 세상을 크게 바꿀만한 큰 힘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에게 행한 친절이, 어린이가 지닌 세계를 따뜻하게 바꿀 수 있는 힘은 당신에게도 제게도 있는 듯합니다. 어린이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의 어른이 어떠한 세상을 가꾸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겠죠.
<참고했던 글>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인권위, 노키즈 존 식당 운영은 아동 차별 행위 / 한겨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린이는 혐오 표현" 지나친 불편함일까요 / 한국일보
NEWNEEK 어린이날 특집 "어리다고 얕보지 말아요"
[둘 / 아이들은 왜 '미숙한 존재' 로 규정되는가] 어린이 인권조약과 아동관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