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이별학교 교장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10년이라는 긴 연애가 끝난 후 3년을 방황하다 보니 나에게는 이별학교 교장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많은 친구들이 이별과 함께 나를 찾아온다. 내가 이별 당시 누구든 붙들고 붙잡고 울었던 것처럼 말이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나는 이별학교 정규 과정을 소개하는데 루트는 대략 이렇다.
- 야, 일단 꾸미고 나와.
- 알았어. 민소매 입고 나갈게.
나의 말에 친구 J는 민소매를 입고 나가겠다고 했다.
나시는 좀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 ㅇㅇ. 야 다 벗고 와.
그녀는 민소매를 입고 나오긴 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런 옷이 아니었다. 내가 상상했던 건 끈나시 같은 캐주얼한 차림이었는데 J는 베이지색 니트에 가디건을 걸친 차림새였다. 골드 계열의 우아한 액세서리도 함께.
- 야, 선보러 왔냐고ㅜ
나는 친구의 톤 앤 매너에 맟주기 위해 가슴이 파인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숨쉬기도 힘든 그 옷을 입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갔다. 이게 다 정규 과정이다.
J는 계속 내 가슴을 힐끔거렸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남자도 그렇게는 안 쳐다본다"고 하자 "보라고 입은 거 아니냐"며 적반하장을 부렸다.
선자리에 나온 듯한 참한 차림의 J는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에 갔다. 그녀는 밤 10시 30분에 잠에 드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최근 입학한 친구는 H이다. 6년 연애 직후 짧은 연애를 거친 뒤 나를 찾아왔다.
복장 안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엔 그저 평범한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새였다. 자신의 차림새에 뿌듯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화장만은 화려하고 과감해서 높은 점수를 주었다. 특히나 그녀는 립 플럼퍼 (입술을 인위적으로 부풀게 만드는 화장품) 까지 들고 왔는데 덕분에 나도 립 플럼퍼를 처음 발라봤다. 입술이 부푸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태원 라운지에 갔다. 그녀는 거기에서 '무슨무슨 오르가즘'이라는 칵테일을 마시며 뿌듯해했다. 익스트림 오르가즘인 줄 알았는데 스크리밍 오르가즘이었다. 공감각을 자극하는 네이밍!
- 저 오르가슴 마실 거예요~! 키득키득
- 넹…마음대로 하세용…
- 저 오늘 늦게 들어갈 거예요~! 엄마한테도 다 말해놨어요. 저 늦을 거라구.
- 넹…마음대로 하세용…
이럴 때마다 불현듯 나의 과거가 스쳐 지나간다. 누가 봐도 과한, 슬럿워크에서나 볼법한 차림새로 거리를 누비던… 그러니까 일종의 시위로서의 차림새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차림새로… 새빨간 매니큐어를 하고….섹스온더비치 같은 칵테일 마시면서 좋아하던…나의 과거가.
아직 붐비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는 바틀을 시키지 않아도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밑도끝도 없이 "오빠가, 오빠가" 거리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 그런데 몇살이세요?
- 오빠? 90인데?
- 나 88인데? (4살 위로 속임)
- (엄청 당황한 얼굴로) 누..누나네..?
- ㅇㅇ 누나라고 해!
그를 뒤로 하고 리크루터 출신으로서 남다른 눈썰미를 자랑하는 내가 오른편에 괜찮은 무리가 있다고 지나가는 말을 했다. H는 갑자기 그 테이블로 돌진했다. 그리고 테이블을 손으로 내려치며 밑도끝도 없이 "안녕하세요!"라고 씩씩하게 외쳤다. 반응이 없자 그들에게 한 번 더 인사했다. 바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바틀 손님이 들어와 우리 자리는 바로 사라졌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가방을 주우며 자본주의를 체감하며 쓸쓸하게 퇴장.
여기까지가 딱 속성 원데이 클래스이다.
한바탕 이 난리를 치고 나면, 그러고 나면 나의 학생들은 이런 걸 묻는다.
- 다시 연락해 봐도 될까? 안하는 게 낫겠지?
- 더 할 말이 남았는데 해도 될까? 안하는 게 낫겠지?
- 도저히 분이 안풀려서 그러는데 나오라고 하고 욕하는 건 어때? 넘 구리나?
사실 안 하는 게 최고다. 모두가 안다. 그렇지만 나 역시 야근하다가 폰부스에서, 점심시간 비상계단에서, 주말 저녁 야외 공원에서, 잠자기 전 이불 속에서 물었던 질문이었다.
- 걍 너 하고싶은대로 다 해. 걍 다 해.
그래서 나는 그냥 하라고 한다. 분명히 후회할 테지만 그냥 하라고.
내가 전 남자 친구 집에 두고 온 (지도 몰랐던), 다신 입지도 않을 내복 (지역에서 겨울 촬영할 때 너무 추워 지역 휴게소에서 급하게 산 내의이다. 그리고 당연히 꽃무늬이다)을 악착같이 보내달라고 해서 받아냈던 것처럼. 끝까지 그 친구를 질리게 했던 것처럼. 그냥 하고 싶은 거 다하라고.
무언가를 하면서, 혹은 하지 않으면서 견디는 거니까. 사실 다른 방법은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계속 기다리는 거다. 다 지나가기를.
다 지나갔다고 믿을 때쯤 상실감은 또 찾아오기도 하는데 또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