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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는 안돼"

"나도 알아. 내가 바보는 아니니까."

by 백요선

"이 정도로는 안돼."

감독 황동욱이 고개를 저으며 카메라를 내린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이 말을 숱하게 들어왔던 순간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주로 '열심히' 연기하고 있을 때 듣는다.

나는 그럼 속으로 말한다. "나도 알아. 내가 바보는 아니니까."하고 말이다.


촬영이 예상과는 다르게 한 5시간쯤 딜레이 됐다. 제작비 이슈로 막차가 끊기기 전에 끝내자는 애초의 다짐과 달리 밤 11시쯤 되고 나니 시간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11시 전에 끝내줄 거라는 감독 말을 나는 또 믿었단 말인가!


유독 한 장면이 넘어가지지 않았다. 이번 작품이 상황 설정만 주어진 즉흥극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뭔가를 미리 준비해 와서 합을 맞추는 방식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대 배우도 카메라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모르고 찍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쉽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머리를 굴려 눈치껏 파악한 바로는 분명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텐데 이걸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렵게 돌아가는 거지? 핵심 이야기라도 픽스해 놓으면 안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감독은 집요하리만치 무언가가 픽스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배우는 감독이 원하는 것을 구현해 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현장 분위기를 봐가며 나름 무언가를 혼자 픽스 해나가도 상대 배우는 '당연히' 다른 걸 해버리니 합이 맞아지지 않았다. 동선이나 액션도 즉흥이라 카메라가 이를 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계속 넘어가지 못한 장면은 특히 ‘진짜 무언가'가 나왔으면 싶다며 감독들이 심혈을 기울여 찍고 싶어 한 장면이었다.


소리 지르고, 욕하고, 뒤집어엎고 하다 보니 지쳐갔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번 작업해 본 나와 달리 상대 배우 친구는 이런 작업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너무 괴로워했다. 환기를 위하여 다른 장면 먼저 찍었고, 야식으로 피자도 먹었다. 그러면 정말 한 세월이 지나있곤 한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제발 집에 보내줘."


새벽 1시가 넘어서 다시 촬영 시작.


심기일전했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애초 극의 목적과는 다르게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 준비하고 반복하고 그러다 보니 감정이 퇴색되었다. 결국 이제까지 하던 것을 다 뒤엎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뭐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해보자고.


상대 배우가 먼저 몸을 던진다. 이럴 때 나는 배우의 '몸빵적 매력'을 느낀다. 배우는 그저 주어진 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냐라고 하면야 '뭐, 그건 그렇지' 수긍하다가도 이럴 때는 '거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온몸을 던져서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무릅쓰는 건 배우이다. 배우가 그 순간에 '진짜로 보고 듣는 게 뭔지도 너네는 모르면서!'


상대 배우가 먼저 몸을 던졌고,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잠시 있었다. 그러자 '진짜 같은' 순간이 나왔다(고 감독이 좋아했다.)

이 '진짜' 순간을 위해 이 난리를 친 거라고 생각하니 감격스럽다가도 현타도 온다. 화면으로 보면 3분 남짓하지도 않을 시간이다. AI가 글도 쓰고, 웹툰도 그리고, 모델도 하고, 데이팅 상대가 되는 시대에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작업인가. 진짜인 한 순간을 위해 우리가 집도 안 가고 피자도 먹고 웃고 울었다.


영화는 촬영만큼이나 스피디하게 완성되어 최근 작은 상영회를 가졌다. 주로 내 친구들이 와서 내 환갑잔치를 미리 보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호적인 관객들 덕분에 영화의 아기자기함이 미덕이 되었다. 즉흥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즉흥극이 연기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특정 상황이 주어졌고, 그 안에서 어떤 선택들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기의 묘미 자체가 여기에 있다. 진짜인 것과 진짜 아닌 것이 끊임없이 교차되다 보면 어느샌가 무엇이 진짜였는지 자체를 반문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도' 연기 덕분에 진짜인 순간을 만났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진짜로' 온순해진다. 내가 가진 위악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주 말랑말랑해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싶어진다. 제일 앞장서서 몸을 던지고 싶어지고, 우스워 보일지라도 이것 좀 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아직 실제로는 못 그렇고 마음만은 그렇다, 마음만은.


언제나.

내가 연기를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작년 봄에 수강했던 인생 첫 시쓰기 수업 ^ㅁ^ 넘 귀여움 못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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