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요선 Nov 11. 2021

돈독한 트레이닝-물건은 어찌 보면 전생의 업보가 아닐까

강제 미니멀라이프의 시작

나는 '진짜로' 얀니 빌라의 거실로 입주하게 되었다.
'진.짜.로'

얀니가 일본에서 잠깐 지낼 때 알게 된 동생이 트럭까지 끌고 와 우리의 짐과 우리를 실어 날라주었다. 그는 젖히기만 해도 무너지는,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내가 무너뜨린 3미터짜리 커텐까지 새로 달아주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없기에 계단으로만 이동이 가능한 빌라까지 우리의 짐을 운반해주었다. 그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얀니를 만났을까. 그리고 그 죄가 얼마나 컸길래 나까지 만났을까.

그렇게 들어선 '진짜' 거실은 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심지어 내 짐들은 엄마집과 오빠집과 부천에 흩어져 있는데다 나의 '진짜' 겨울옷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사실 오늘, 겨울을 맞아 그리고 나이에 맞게 고오오급스러운 하얀 코트와 하얀 모직 원피스를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발디딜 틈 없이 늘어져 있는 짐들을 보며 그 마음을 접기로 했다. 


왜냐면 나에게 주어진 작은 옷장은 이미 내 옷들로 꽉 차 아무것도 더 넣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옷장에는 진짜 겨울 옷은 검은 겨울 코트 한 벌 뿐이었지만 이미 포화상태였다. 나에게는 핑크색 패딩, 회색 패딩, 네이비 패딩, 갈색 코트, 네이비 코트가 더 남아있는데도!

짐들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쑤셔넣기 위해 노력하며 나는 세 벌의 옷을 더 버렸다. 여기에 오기 전에도 몇 개 버렸고, 이제 진짜 더 버릴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짐더미 한가운데 앉아있다보니 뭐라도 더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뭐라도 더 버리고 싶어졌다.

나름 미니멀 라이프인 얀니에게도 태초에 책이 있었다. 우리는 짐들을 '업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그녀의 '업보'도 만만치 않았다. 무거운 책들을 이고 지고 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일단 1차 짐 풀기를 끝내고 씻고 나와 다시 치우려는데 얀니의 쉐어하우스에 거주하는 착하고 털털한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자신의 방에서 머리를 말리라고 권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녀의 업보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는 그 또래 여자친구들답게 수많은 화장품과 옷들이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물건들이 있는 것인지 감탄이 들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수많은 나의 화장품들, 수많은 문구류들, 수많은 옷더미들이 떠올랐다. 수많은 귀걸이, 수많은 헤어밴드, 수많은 굿즈들. 나는 약간 괴로워졌다.

그 물건들을 살 돈으로 그 물건들을 둘 수 있는 부동산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로 시작된 생각은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은 아닐까, 까지로 비약했다. 아직 부동산은 커녕 무엇 하나 크게 소유하고 있지 않은 나이지만.

작은 공간에 꾸역꾸역 물건들을 넣고 계속해서 치우는 삶을 사느니 그냥 넓은 공간을 갖는 게 나은 것 같고, 그러다가도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 그냥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과 가벼움이야말로 정말 좋은 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릿속에 오갔다.

내가 과연 어떤 공간에 살게 될 것인지는 지금으로선 아무 것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걸 원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물건을 두어도 넉넉한 공간, 예를 들면 우리 오빠는 어쩌다 쓰리룸 아파트에 혼자 사는데 옷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옷방이 따로 있다, 에 살 수 있게 될 것인가. 혹은 살 것인가. 그 길을 꿈꿀 것인가. 아니라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기동력을 갖춘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그러면서도 미학적인 삶 말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물욕이 있는 편이고 아기자기한 '예쁜 쓰레기들'에서도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시에 점점 더 갈수록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고 싶기도 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러니까 여기까지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책임감이 드는 일이고, 그만큼 피로함이 드는 일이라는 것. 내가 어떤 것을 가지게 될 때는 그것이 주는 즐거움과 만족과 행복만큼이나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든다는 것.

그리고 어떤 물건을 사기로 결정할 때는 그 고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해(이것도 물론 무척이나 중요) 사지 말고, 포기하라는 게 아니다. 정말 이 물건과 계속해서 함께 해도 즐겁고 그를 위해 내가 책임을 질 각오가 있는 지를 떠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늘 2030들의 혹은 그들을 위한 재테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오는 짠테크가 '욕구를 억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듯하여 다 맞는 말이지만서도 부담스러웠다. 동시에 너무 많이 시켜서 통째로 버려지는 배달 음식들과 시즌마다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들 사이에 있다보면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닐까 늘 생각한다. 존재하는 욕구를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마냥 치부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재미있고, 그렇다고 그것들에 집착하면 할수록 공허하고 숨 막히는 일은 없다.

또 한창 우리를 휩쓸고 간 일종의 자조적이면서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새로운 형태의 라이프 스타일 욜로족들과 그 욜로족들을 비아냥 거리는 의견 둘 다에도 나는 그리 마음이 가지 않았었다. 우리에겐 현재가 아니라 미래도 있고, 동시에 미래도 있지만 현재도 있으니까. 

나는 그래서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내 삶을 꾸리는 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멋진 인생에 가까워지는 길이지 않을까 한다. 책임감이라는 말이 예전에는 어딘가 무겁고 너무 엄숙하고 그러다보면 좀 고리타분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보다 멋진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2022년은 내가 나를 더 잘 책임지고, 나의 일과 인연들에 더 책임감을 가지는 해를 보내고 싶다. 내가 가진 물건들도 책임감 있게 사용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친구들부터 잘 건사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겨울만이라도 쇼핑을 일절 하지 않으려 한다.

썬룸에서 살기 위해 시작된 강제 미니멀라이프는 나를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도약시켜 줄 것인가.
 썬룸에서의 수기, 그 첫째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돈독하게 트레이닝 - 우리는 '썬룸'으로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