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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Dec 20. 2021

'알고도' 할 수 있을까: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1차시 수업: 내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인물

2021.12.12.일요일.
32회 영화연기 워크숍 1차시 수업: 내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인물



나는 오랜만에(?) 다시 연기 워크숍에 참여 중이다. 이제는 진짜 배우로서의 애티튜드를 장착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당분간 연기를 할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굳이 시작한다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에게 기대되는 것을 이제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시장'으로 진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에 맞는 커리큘럼이라 이 타이밍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있었다.

첫 수업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인물 소개' 시간이었다.

"여러분 첫 수업 과제는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들여다 보기 위한 과제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인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해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걸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계속 들여다 봐야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수준 높은 영화를 대어야 할까' 생각했다가 결국 '올드보이'를 골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강렬함과 미장센에 마음을 뺏겼고 그 뒤로도 늘 볼 때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난 어느 정도의 세팅이 된 세계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도 그 영화는 내게 '영화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원작이 굉장히 문학적이나 영화에서 그것을 풀기에는 다소 애매한 감이 있어서 '왜 가뒀는지'가 아니라 '왜 풀어줬는지'에 집중했고, 하필이면 '15년이 걸린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했다는 박찬욱 감독분의 GV를 들으며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대단한 변태가 있을까, 감탄했던 기억도 있다.

오랜만에 올드보이와 관련되 신형철 평론가의 평론도 읽어갔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올드보이와 엮어 풀어내는 평론인데 굉장히 흥미로운 글이다) 특히나 라캉이 말하는 두 가지 '앎' 중 '알지 못하는 앎'에 우리의 진실과 향유가 있다는 내용, 오대수의 진실과 향유가 '근친상간'(어떤 질서를 붕괴시키는 것)이었고 그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The Thing'(명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내용의 평론이다. 즉 오대수는 몰락하면서 동시에 숭고해진다.

나는 이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 또는 이야기와 인물들을 정리해보았는데 그런 지점에서 어떤 공통점들이 보였다. 바로 '알고 하는 사람들' 혹은 '알면서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피아니스트, 킬링디어, 팬텀스레드, 이터널선샤인 등이고 대개 '이우진'같은 캐릭터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내 욕망이 '알고자 하는 것'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조적인 태도, 그러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평론가의 태도와 유사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평론이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을 깊게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객관적인 언어로 주관성을 짚어내는 것이 굉장히 의미있고 지적이라고 생각해서 이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게 내 '욕망'이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발표 차례가 오기 전까지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꾸 내가 내린 나의 잠정적인 결론에 반문을 하게 되는 거다. 한 친구가 본인은 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를 몇 번 되물었더니 자기 모순을 발견하고 처음 했던 이야기를 수정하는 과정을 옆에서 듣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어쩌면 내가 이렇게 시니컬하고 관조적이면서 동시에 이렇게 적극적이고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뭔가를 해대는 이유가 실은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떤 것에 깊게 관여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됐다. 임상 심리사를 하는 친한 친구가 늘 나에게 너는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집단에 속해있는데 한 번도 그 집단에 본인을 동일시하지 않고 늘 그들을 관찰하는 게 인상깊다고 했던 이야기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누구보다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란 반문을 하게 됐다. (이 타이밍에 한 동생이 나에 대해 말하기를 어떻게 저렇게 관심없다는 듯이 관심을 표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도 했던 것 같다 ㅎㅅㅎ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는 게 키포인트..) 그리고 내가 연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도 어쩌면 굉장히 무언가를 깊게 이해하고, 어떤 것에 속하고 싶어서일까란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꼬여버리니 마침 기양 친구가 말했던 '읽는 사람 손목 긋게 만드는 문학'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왔다. 어떻게 남들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나만의 취향이 묻어나는 개별적인 것들을 할 수 있을까,도 고민된다고 두서없이 말을 끝마쳤다. 

감독님은 들으시더니 '최초로 관계 맺는 방식'이 한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나는 세계의 모순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고보니 내가 한 영화의 작업을 위해 내 개인적인 최초의 사랑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다시 들춰보니 꽤 의미심장했다. 나는 최초의 사랑의 기억을 그 사람의 부재와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이라고 말했더랬다. 어렸을 때 일어나면 눈 앞에 엄마가 없었는데 엄마는 자고 있는 내 볼을 깨물고 나갔었다. 나는 그 잇자국을 보며 안심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부재를 슬퍼했던 것 같다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라고 답했다) 모순이 없는 세계가 오히려 너무나 생경하여 늘 의심하고 동시에 그렇지만 궁금해서 늘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렸지. 분명히 나는 내 외모와 목소리와 체구와 이미지와 내 연기 패턴에 어울리는, 그래서 내가 하면 가장 안정적인,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도 저런 걸 할 것으로 기대되는 나에게 딱 맞는 캐릭터를 찾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준비해 간 <친절한 금자씨>를 리딩했다.

<기억하고 싶은 말들>
- 표현하는 것 중 최고가 연기가 아닐까. 다른 도구를 빌리지 않고 자신을 사용해서 하니까. 오로지 내 목소리로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

- 연기란 그저 느낄 수밖에 없는 것. 상대를 제어할 수도, 어떤 계획이나 흐름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것. 그저 상대가 하는 것에, 그 흐름 속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 모든 연기를 잘 할 수는 없다. 내가 깊이 느낄 수 있는 것만을 제대로 할 수 있다


+ 추가로 수업 현장에서는 '내가 실은, 부단히 아닌 척 하지만!!! 무언가에 뛰어들고 마음 깊이 관여하고 싶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분열된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게 맞고, 이걸 '사실은/알고 보면'이라는 식으로 쉽게 결론내리고 싶지 않다. 또 내가 연기를 하고 싶은 어떤 근본적인 이유도 실은 연기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열적인 상태'이고 그렇지만 연기라는 행위는 지금 분열 중이라는 것을 '알고 하기 때문'인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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