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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Dec 22. 2021

우리는 어쩌다 '우리'가 되었나

2021년도 돈독하게 트레이닝을 마치며: 김얀 작가 대헌정 서사시!

1. 나는 생각보다 꽤 혹독한 29살을 보냈다. 사람도 잃고 돈도 잃고 꿈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간 정말 매일같이 엄마와 소리지르면서 싸우고 엄마에게 욕을 먹으면서, 갈 곳이 없어 전전하고 방황하면서, 계속 실패하고 떨어지면서, 이 나이까지 이렇게 살 줄 몰랐다고 스스로 자책했는데 더 최악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한 해였다.  그간은 은은하게 죽고 싶다고, 굳이 별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이때 나는 정말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간 쥐죽은 듯이 누워 지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식욕을 잃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이때만큼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한 택시 기사와 시비가 붙어 지구대까지 다녀오게 된 날, 이렇게는 지낼 수 없단 생각에 무작정 친구가 있는 군산으로 내려갔다.

거기에서도 나는 거의 누워 지냈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시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고 근처 시장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혼자 방 안에 누워 울기도 많이 울었다. 고향인 해남에도 가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났다. 언제부턴가 친척 어른들을 만나는 일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었는데 할머니와 단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할머니와 마주 보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잤다. 깔끔하고 따뜻하고 푹식한 잠자리였다. 나는 술 먹고 계단을 헛딛어 발을 크게 다쳤었는데 매일 할머니는 따뜻한 물로 내 발을 씻겨 주었다. 꼭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어떤 의식을 치루듯 우리는 매일 저녁 세족식을 했다.  다시 뛸 수 있을까, 라고 농담할 정도로 꽤 오랫동안 발이 아팠었는데 그때만큼은 다 나은 것 같았다. 이런 게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울었다. 군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남에서도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시도하다 계속 가진 것을 잃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그런 건 거의 늪과 같아서 A가 실패하면 B가 탈출구처럼 보이고, 그러다 B가 실패하면 C가 보이는 식이었다. 나의 피해액은 점점 누적되어 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 마음 속 원망의 말들을 내뱉었다. 크게 소리지르고 울었다. 할머니와 매일같이 함께 누워 잤는데 할머니는 그 날은 나 혼자 자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할머니와 짜파게티도 끓여먹고, 떡볶이도 해먹고, 회도 먹고, 막걸리도 마셨다.   


나는 사실 그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진지하게 해남에서 살아볼까, 여기서 일자리를 찾아볼까 생각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까. 다시 해볼 수 있을까. 그런데 도대체 뭘 하지. 이런 식의 끝도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신감도 하나 없고 너무나 괴로웠지만 때맞춰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 왔다.




2. 나의 친구 혜영이가 나에게 트위터를 가르쳐준 이후 나는 꽤 오랫동안 트위터를 눈팅용으로 쓰고 있었다. 얀 언니의 트윗도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되었다. 38살까지 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았다가 돈에 대해 공부하며 바뀐 삶의 과정들이 솔직하고 씩씩하게 쓰여진 글이었다.


이름있는 출판사에서 나온, 나도 들어본 적 있는 단행본 2권을 낸 작가도 저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도 했다가 힘을 내게도 했다. 돈선생부터 캐시까지 주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상도 정말 재미있어보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현실적인 선택이란 걸 해야함을, 그렇지만 그건 내가 나를 책임지는 무척 중요한 일임을 알려주었다. 때맞춰 나는 정말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뭐라도 시작해야만 했다.

사실 처음부터 직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사실 취업이란 게 정말 어렵기도 하고, 내가 갑자기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확신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잠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또는 단기 계약직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규칙적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심기일전하여 내가 하고픈 일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 구직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놓여지니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그때쯤 얀 언니가 M&A(머니앤아트) 모임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냈다. 나는 좀 늦었지만 용기내어 디엠을 보냈고, 그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3. 얀니는 내가 꽤 적극적이라고 했지만 언니도 못지 않았다. (우리는 늘 서로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라고 농담하곤 한다) 사실 언니는 '작가님'이기도 하고, 나와 나이차이가 적지 않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과 불편함이 없지는 않았는데 언니가 먼저 전화도 해주고(1시간이나 통화함), 지금 내 회사 근처 맥도날드인데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불러주기도 했다.


2020년 8월에 언니의 사무실인 얀피스를 첫 방문한 뒤, 거의 매주 드나들었다. 늘 사람들과 이야기와 재미가 넘쳐나는 얀피스였다. 정말로 재밌었다. 언니 주위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어떻게 이렇게 웃기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지, 감탄할 뿐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날은 시 '서른'과 '마흔'을 읽기도 하고, '배우'와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험담하기도 하고, 섹스 체위에 대해서 떠들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하고 또 하다가 2020년 연말부터 나는 아예 부천에 눌러 같이 살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서로 다른 곳으로 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자는 방식의 반동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자가격리 2주까지를 보내고 2021년 5월 나는 다시 오빠 집으로 갔다가 그 해 9월에 인연 정리로 힘이 들 때 다시 또 함께 살고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튜브도 같이 찍고, 연기 수업도 같이 듣고, 같은 피부과와 같은 정형외과를 다니고, 다이어트 트레이닝도 함께 하고, 임장도 같이 가고, 주식과 코인 투자까지 함께 하는 콘텐츠/생활습관/투자 공동체가 되었다.


4. 사실 얀니와 나는 무척 다른 사람이다. 나는 사실 솔직하지 못하고 언니는 매우 솔직하다. 나는 편견과 선입견이 많은 사람이고 언니는 그런  거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남자에 대해 거의 모르거나 알지 않으려 하고 언니는 상당히 많이 안다. 나는 술과 음식을 좋아하고, 언니는 다행히 술은 안마시고 식욕도 별로 없다. 나는   아는  별로 없고 언니는 손이 빠릿하고 눈치가 빠르다. 나는  생각 없이 거의  사는 편이고 언니는  매장  매장  둘러보고  번씩  입어보고 결국  사는 편이다. 나는 겁이 많은데 미쳐있다면 언니는 겁도 없고 미쳐있기까지 하다. 애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 언니는 ", 그래. 알았어"하고 떠나보낼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성숙한  하다가 후회할  알면서도 새벽 3시에 저주를 일목요연하게 어순  맞춰서 퍼붓고 그걸 두고두고 미안해할 것이나 자존심에 사과는 하지 않을테고 그렇지만   그걸 두고두고 마음에 담을 스타일인 것이다.


비 와도 우리는 런데이 GO



처음에는 의심도 했다.

"정말? 정말 그래? 정말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본 언니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그건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맞다고" 하는 사람인 것이다. 솔직하고 강한 사람.

물론 모든 순간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생각보다 징징거리는 편이니 사람을 질리게 하는 순간이 있고, 언니는 생각보다 냉정한 편이라 사람을 서운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최승자 시인을 이해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운을 믿고, 쇼미더머니와 스우파를 즐겨보고, 잘생긴 사람과 돈을 좋아한다. 내 친구가 나에게 "현실감각과 광기가 같이 있기 어려운데 그걸 가지고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언니도 마침 딱 그런 셈이고 실은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니 어머니의 말마따나 낙엽 굴러가도 꺄르르 웃는 10대 소녀들마냥 많이 자주 웃는다.   



5. 언니의 생일에 나는 편지를 썼다. "언니를 만난 건 나의 행운"이라고, 그리고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친절과 다정을 베푸는 방식으로 이를 갚겠노라고 썼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힘들 때마다 그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해준 건 언니의 글과 이야기였다. 그리고 함께 웃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실제로 할 것인지까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함께 전국을 떠돌며 살 수도, 호주에 갈 수도,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고 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나는 그녀의 글과 이야기에 진 빚을 어떤 방식으로든 갚아나갈 것임이 분명하다. 나의 일상을 잘 기록하는 것도 그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나름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양양에서 언니가 내 보드까지 대신 옮겨주고 난 뒤


6.  연기를 시작했냐는,  예술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그간 비웃었었다.( 사람들이 어떤 오만함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당연히 안다. 그럼에도 비웃었던   성격이 괴팍해서일 것이다) 자기가 남에게 영향씩이나 미칠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대체 뭐지? 내가 봤을   그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아 좋아질  있다고 믿는  순진함을 참을 수가 없네. 인간이라는게, 삶이라는게 그렇게나 단순하다고 정말로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이제보니 내가 영향 받았고, 내가 바뀌었다.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깨졌고, 인간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 넓어졌으며,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영항을 끼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음을,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선의'라는 게 있다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이것을 잊을라치면, 잊을 때쯤이면 누군가의 말과 글과 이야기와 삶이 내게 와 준 것을 보니 그렇다. 그러니 그것들에 기대어, 그것들에 힘입어 나 역시 계속해서 써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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