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그릿, 열정, 스케일업은 언제 끝날 것인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막 하려던 참이라서 나는 좀 들떠있을 때였다. 나는 꽤 무기력한 시간을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겨우 한 달 남짓이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붕 떠 있는 시간이라 이 한 달이란 시간이 길고 길게 느껴졌다), 거의 처음으로 혼자 (이것도 따지고 보면 그렇진 않다. 친구들의 은은한 보살핌과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었다) 보낸 뒤 막 새로운 직장에 입사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 곳은 브랜딩이 잘 되어 있는 스트트업이라서 굉장히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보였고, 이렇게 좋은 직장을 누가 관두려나 싶게끔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입사하자마자 사실은 내가 전임자를 대체하는 채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조금 놀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에게 인수인계해주는 전임자는 불안해보였고 피로해보였다. 나는 그녀와 단시간에 꽤 친해졌는데 그녀가 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H님, 그런데 왜 퇴사하시려고 하세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요선님, W에서 일하면 정말로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댓가가 따르더라구요. 저는 성장 그만 하고 답보하고 퇴보하고 싶어요 ㅋㅋㅋㅋ"
막 새로운 커리어로 새 삶을 시작해보려는 나에게, 성장뽕에 취해있는 나에게 그녀는 "답보하고 퇴보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저런,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싶었다. 그 당시의 나는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고, 다 배우고 싶고, 다 내가 직접 하고 싶었고, 그래서 성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나도 이만 답보하고 퇴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년간 나는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기계발이라는 세계 속에서 살았다. 그렇다고 찐 자기계발러들이 들으면 코웃음치겠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는 그랬다. 예전에는 그런 사회적 논리를 내면화하는 삶이 우습고 시시했다. 그런데 그게 내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자 꽤 의미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사회화 과정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서른 늦은 나이에 돈을 벌기 시작했고(물론 그 전에도 나는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늘 벌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회적 관계를 의식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집을 나와 가족과 떨어져 산 것도 인생에서 처음이다.
아무 의미 없었던 건 아니다. 투자가 (일단은) 실패해서 푸념하는 것도 아니고, 관계의 어려움이 계속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다시금 '성장'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게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싶은 거다. 내가 생각한 성장이란 더 많은 물건을 더 많이 파는 게, 더 빨리 규모를 키우는 게, 더 더 더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이클 안에서 괴롭고 어지럽다. 특히나 계속해서 '스케일 업'을 말하는 스타트업계에 있다 보니 이 피로함이 더 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성장은, 타인에게 더 너그러워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해보는 것, 나에게도 상냥하면서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럴 여유 자체가 없다. 모든 게 다시금 시시해지고, 다 별 볼 일 없게 느껴진다. 다시 오만해지고 냉소적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럴 것 같다. 이 레이스를 모두 어떻게 견디는 걸까. 어떻게 끝나는 걸까. 그리고 그 끝에는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