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요선 Jun 09. 2023

재미있게 묵묵하게 떨어지기

스타트업 씬에서는 나름 경력이 있다 보니 이제 서류에서 필터링되지는 않는다. 대학교 창업팀 경험부터 좋은 스타트업으로 알려진 회사 두 군데를 거치고나니 스타트업 채용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구구절절 자기소개를 할 필요도 없이 재직했던 회사들이 기재된 링크드인 주소만 보내도 만나보고 싶은 팀은 다 만나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난 경험들이 나에게 준 선물은 채용시장에서의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했던 경험이 어떤 점에서 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지, 내 강점은 무엇인지를 잘 어필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또 (우스갯소리이지만 진실인) 컨설팅펌 출신 대표님은 나와 맞지 않는다든가, 특정 업계는 어떤 점에서 나에게 힘들다든가 하는 '레슨런'도 쌓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몸 담아보고 싶었던 업계에서 사업 개발스러운 HR을 하고 있는 지금이 나에게 최적일지 모른다.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하는 HRer 커리어로 보면 꼬였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원하던 커리어를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 그렇다 할 경력이 쌓이지 않은 다른 일에서는 계속 고배를 마시고 있다. 오디션에 넣는 족족 서류 통과 한 번 없이 떨어지고 있다. 채용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해 본 입장에서 그 시장에서의 내 경쟁력이 딱히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혈기 어린 열정은 원래 없었고, 그렇다고 경력이나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닌 아주 어중간하고도 애매한 상황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어중간한 재능으로 영원히 고통받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한 살 한 살 착실히 나이를 먹어가며 더 커지고 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고배를 마신 날, 희곡을 쓰는 친구와 곧 문을 닫는 극장에서 하는 마지막 공연을 봤다. 증명할 필요 없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지막과 참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좀 증명을 해보고 싶은 나는 이런 애매함을 이야기했고, 그 친구 역시 자신도 비슷한 처지라고 공감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위로가 되었다.


동시에 사실 그 강점들은 이미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장점이자 한계인 그것들을 좀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냥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냥 꾸준히 해볼 수밖에. 과감하게 회사를 때려치우기엔 지금의 커리어와 생계도 중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연기와 할 수 없는 연기도 명확하다.


30대에 들어서 내가 한 다짐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굳이 하겠다고 한 이상, 그러니까 내가 좋다고 한 일이니 재미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거기에 나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묵묵하게 해 보기를 추가해 본다. 회사에서는 신사업 런칭을 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완성하고 영화 제작에 참여해 볼 예정이다. 그 중간중간 또 무수히 많이 떨어지겠지. 재미있게 묵묵하게 떨어져 보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자신과의 좋은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