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씬에서는 나름 경력이 있다 보니 이제 서류에서 필터링되지는 않는다. 대학교 창업팀 경험부터 좋은 스타트업으로 알려진 회사 두 군데를 거치고나니 스타트업 채용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구구절절 자기소개를 할 필요도 없이 재직했던 회사들이 기재된 링크드인 주소만 보내도 만나보고 싶은 팀은 다 만나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난 경험들이 나에게 준 선물은 채용시장에서의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했던 경험이 어떤 점에서 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지, 내 강점은 무엇인지를 잘 어필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또 (우스갯소리이지만 진실인) 컨설팅펌 출신 대표님은 나와 맞지 않는다든가, 특정 업계는 어떤 점에서 나에게 힘들다든가 하는 '레슨런'도 쌓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몸 담아보고 싶었던 업계에서 사업 개발스러운 HR을 하고 있는 지금이 나에게 최적일지 모른다.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하는 HRer 커리어로 보면 꼬였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원하던 커리어를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 그렇다 할 경력이 쌓이지 않은 다른 일에서는 계속 고배를 마시고 있다. 오디션에 넣는 족족 서류 통과 한 번 없이 떨어지고 있다. 채용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해 본 입장에서 그 시장에서의 내 경쟁력이 딱히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혈기 어린 열정은 원래 없었고, 그렇다고 경력이나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닌 아주 어중간하고도 애매한 상황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어중간한 재능으로 영원히 고통받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한 살 한 살 착실히 나이를 먹어가며 더 커지고 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고배를 마신 날, 희곡을 쓰는 친구와 곧 문을 닫는 극장에서 하는 마지막 공연을 봤다. 증명할 필요 없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지막과 참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좀 증명을 해보고 싶은 나는 이런 애매함을 이야기했고, 그 친구 역시 자신도 비슷한 처지라고 공감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위로가 되었다.
동시에 사실 그 강점들은 이미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장점이자 한계인 그것들을 좀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냥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냥 꾸준히 해볼 수밖에. 과감하게 회사를 때려치우기엔 지금의 커리어와 생계도 중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연기와 할 수 없는 연기도 명확하다.
30대에 들어서 내가 한 다짐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굳이 하겠다고 한 이상, 그러니까 내가 좋다고 한 일이니 재미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거기에 나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묵묵하게 해 보기를 추가해 본다. 회사에서는 신사업 런칭을 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완성하고 영화 제작에 참여해 볼 예정이다. 그 중간중간 또 무수히 많이 떨어지겠지. 재미있게 묵묵하게 떨어져 보기로 마음을 다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