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향 게임, 그리고 여성 유저에 대한 이야기들
게임 업계에서 여성의 구매 능력이 지금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었을 때가 있었을까요.
<여성향 게임>은 근래 몇 년간 동아시아의 게임 시장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떠오르는 장르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한국까지 매출 순위에 종종 이름을 올리는 타이틀이 생겼으며, 이따금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여성 유저의 소비 저력을 인증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모으기도 합니다.
대세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게임 장르이지만 명확한 타깃과 확실한 니즈가 있는 시장임에도,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한 콘텐츠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쉬워, 제 나름의 시각으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게임 업계인, 혹은 게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성향 게임>이라는 명칭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성향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일본어의 女性向け. 문자 그대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게임의 장르를 칭하는 말인데, 한국 및 중국에서도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폭넓은 의미로는 여성 유저 비율이 높은 캐주얼 게임 등도 포함이 될 수 있겠으나,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여성향 게임입니다. 양쪽 모두 여성을 타깃으로 삼고 있지만, <여성만을 위한 것인가/여성 외에도 시야에 넣을 것인가>에 따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애초에 남성향 게임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니, 여성향을 장르의 이름으로 치기에는 다소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남성 위주의 시장이었던 한국 게임계에 여성이 타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자체가 고무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 한국에서 좁은 의미의 여성향 게임은 이렇다 할 빅타이틀이 없는 점은 아쉽지만요. (인기 타이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랭킹 및 화제성, 매출 규모에 미루어 안정적인 수익과 인지도면에서 다소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최근 아시아 게임 컨설턴트 업체 Niko Partners에서 여성 게임 유저의 인게이지먼트를 높이기 위한 4대 키워드 중 하나로 <여성 유저가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캐릭터, 게임성>을 꼽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념적, 직감적으로 남녀 유저가 게임에서 얻고자 하는 중점 가치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남성 유저는 경쟁 및 자기 성장, 여성 유저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여성 유저가 아무리 캐릭터와 스토리를 중요시한다 하더라도 게임으로써의 재미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성 유저에 대한 주요 소구 포인트에 대해서는 2019년 텐센트의 여성향 관련 발표가 정리가 잘 되어 있었으므로 관련 내용을 인용합니다.
특히 여성향 게임은 연애나 성장 등의 주제를 통해 등장 캐릭터들의 서사를 간접 체험하며 감동과 기쁨을 얻는 것이 주요 동기로 작용합니다.
캐릭터성과 서사 및 그로 인한 감정이입과 공감이 필수 요소이므로, 탄탄한 스토리가 중요시되며 캐릭터의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까지 매력을 느끼며 애정을 품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돌 비즈니스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여성향 게임의 핵심 유저들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관심이 많고 이용자의 IT 및 소셜 미디어 리터러시가 높아 커뮤니티 구축이나 동인 활동에 능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최초의 여성향 게임은 일본의 서브컬처 시장을 베이스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소수의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수익 구조가 짜여있습니다. 게임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 믹스를 전제로 IP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탄탄한 비주얼과 사운드는 필수 요소입니다. 그런 성향에 따라 일본 서브컬처 스타일(미려하고 섬세한 묘사의 애니메이션 풍 2D)의 아트를 채용하는 타이틀이 많으며, 성우 또한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성향이 게임의 한 장르로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26년 전의 일본에서부터 입니다.
삼국지나 무쌍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현 코에이 테크모)>가 1994년 출시한 "안젤리크" 시리즈는 플레이어 캐릭터(여성)의 육성과 함께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와의 연애를 다룬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여성향 게임의 서브 장르 중 하나인 오토메 게임(乙女ゲーム:연애 요소가 있는 여성향 게임의 통칭)이 탄생했습니다. 코에이는 네오 로망이라는 브랜드명으로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오토메 게임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약 30년간, 여성향 게임은 오토메 게임 이외에도 다양한 타이틀이 발매되었으며 시장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탄탄한 마니아층을 가진 장르로 성장하였습니다. 먼저 언급하였듯 서브컬처를 바탕으로 삼고 있으므로, 서브컬처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한국/중국/일본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본의 이야기를 하자면 2005년 PSP로 발매된 "우타프리(うたのプリンスさまっ:노래의 왕자님)"의 대성공으로 인해 시장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를 맞습니다. 성우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믹스의 상업성이 증명되어, 비즈니스 모델을 채용하고 있는 타이틀이 다수 등장하게 되지요.
이러한 경향은 모바일 시대로 넘어온 현재까지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고 있어 매너리즘에 빠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여성향 대형 IP의 증가로 인해 여성용 콘텐츠의 규모를 인지시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미디어 믹스를 전제로 한 비즈니스 모델은 소비 단가의 팽창으로 기존 유저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우려도 있습니다.
중국의 여성향 게임 시장은 2015년 "미라클니키(奇迹暖暖)"의 출시 이후 급격히 확대되며, 2017년 "러브앤프로듀서(恋与制作人)"의 대히트를 통해 한단계 진보합니다.
기본 2차원(二次元:중국에서 서브컬처 계통 장르를 칭하는 통칭) 장르를 베이스로 하고 있으며, 일본이 20-30년간 꾸려온 시장을 요 몇 년간 엄청난 스피드로 답습하며, 중국만의 스타일로 어레인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1~2년은 <텐센트>나 <넷이즈> 등 업계 TOP개발사들이 제작과 퍼블리싱에 참여하는 케이스도 이어지고 있어, 대형 개발사들의 신작이 출시될 2020년 후반~2021년에 또 한 번 시장의 지각 변동이 예상됩니다.
현재 출시를 앞두고 있는 타이틀의 작품 경향을 보면 일본 진출에 대해 대단히 의욕적임을 알 수 있는데, 머지않아 일본(+한국) 내 여성향 게임계의 생태계를 서서히 잠식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중국 게임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요.
한국에서도 2019년을 기점으로 몇몇 대형 개발사들이 시장에 뛰어들어 시행착오를 겪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까지는 일본/중국의 해외 인기 타이틀을 즐기는 유저의 비중이 좀 더 높은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덕질을 위해 각종 외국어를 구사하는 한국 유저의 열정은 세계 톱클래스라 생각합니다)
아직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나 저는 한국 시장 특유의 발전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여성향 게임 시장 자체가 아직 성장 초기이므로 다양한 성장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는 것은 큰 강점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의 여성향 게임 미디어 믹스는 서브컬처를 주축으로 고착화되어 있기에 파이 확대의 한계가 명확하나, 한국의 미디어 믹스 시장은 일본과는 다소 양상이 다릅니다.
일례로서 웹툰 등과 연계한 한국 스타일의 미디어 믹스를 거친다면 드라마 / 영화화 등 메인스트림으로 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에서 여성향 게임으로 떼돈 벌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글쎄요...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시장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성 유저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깐깐하며 섬세합니다. 다소 매니악한, 오타쿠스러운 취미를 갖는다고 해서 그러한 여성의 특성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여성 유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들이 원하는 인사이트를 충족시키는 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왔을 때, 여성향 게임이 또 하나의 한국식 문화 콘텐츠로 거듭나리라 기대해봅니다.
고작 2D에 불과할 뿐인 여성향 게임이 어째서 수많은 소녀들, 언니 누나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걸까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여성이 공감하며 감정 이입하기 쉬운 소재와 더불어, 게임이니 가능한 인터랙티브 성이 감동을 더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여성향 게임은 다소 정체기에 들어서 있다고 느껴집니다.
특히 시장의 중심에 있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다소 혁신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 단계 더 레벨업을 하느냐, 이대로 마니아 중심 시장으로 끝날 것이냐의 갈림길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합니다. 여성향 게임은 국경을 초월해 차원의 벽 따위도 가볍게 넘나들 수 있는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성장에 대한 감정이입은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이며, 게임이라는 매체는 특유의 상호 작용을 통해 그 감동을 증폭시킬 수 있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인생의 여러 장면에서 여성향 게임을 통해 울고 웃고 설레는 날들을 보내기도 한 일개 과몰입 덕후로서 바라건대, 앞으로도 여성향 게임 시장이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좋은 작품을 낳고, 그 작품들이 많은 여성들의 삶의 한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참고자료]
- niko partner. <Play like a girl: Key ways to engage one of Asia’s fastest growing gaming audiences> 2020
- 腾讯(00700)女性向游戏负责人:女性向爆款的机会在这4个品类 2019
- 각 게임 타이틀의 이미지는 공식 사이트, 앱스토어, 보도자료 등에 공개된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