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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Nov 07. 2019

예쁘고 깨끗하지 않아도 괜찮아

페루 아레키파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의 주방을 기억하며

뜨겁게 내리쬐는 페루의 햇살을 뒤로하고 축축한 돌이 뿜어내는 습기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딛는다. 저 멀리 보이는 숯검댕이 주방이 어둑어둑 가까워 온다. 투박하고 두터운 주방 용기들이 이곳저곳 늘어져있는 이 곳은 페루 아레키파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의 수많은 주방들 중 하나이다. 수녀들이 지내는 방이 모여있는 곳마다 하나씩 마련된 주방들은 각기 다르지만 하나같이 툽툽하다.



머리 위를 찌를 듯 쏘아대던 열기도 이 주방 안에선 잔잔한 온기에 불과하다. 거친 돌들로 쌓은, 거뭇하게 탄 아궁이가 예쁘다고 하기엔 너무나 못났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단순하고 고요한 이 공간에 나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내 고른 숨소리만 울리는 주방 안에서 매일 불을 지폈을 수녀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물을 끓이고, 채소를 다듬고, 말라 딱딱해진 빵을 수프에 뜯어 넣으며 점심을 준비했을 모습이 눈 앞에 생생하다. 그녀들의 손은 아궁이처럼 검은 때가 묻었고, 썰고 있는 채소의 일부분은 벌레 먹었다.


우리 집의 주방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새삼 요리를 하는 곳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내게 주방은 잘 꾸며진,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손색없어야 할, 예쁘고 깨끗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사방이 검은 이 공간에는 허기짐과 추운 날들, 메컴한 연기와 김으로 가득 차 있다. 먹고사는 우리의 풍경이 단 한 두 세기 사이에 완전히 바뀐 것을 실감했다. 그 옛날의 시간을 지나 지금을 살아가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노력 없이 얻었나 하는 감사함과 함께 내심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읽으면서 가장 놀란 부분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이 수녀들의 주방 안을 둘러보며 나는 농사지을 거름으로 쓰기 위해 동네 아이들이 한 곳에서 대변을 봐야 했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이었고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먹는 밥이 다음 연도에 자랄 쌀의 영양분이 되는 순환하는 그런 삶이 내게는 없다는 그 깨달음이 갑작스레 나를 슬프게 했다.


요즘 시대에 '똥을 모아 거름으로 쓰고 그 작물을 먹는다'라고 하면 고개를 내두르며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깨끗한 장소에서 깨끗한 재료를 먹고 깨끗하게 살고 있다. 슈퍼에 진열된 채소에는 촉촉하게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예쁘지 않은 것들은 아무도 집어가지 않아 버려지곤 한다. 유기농 브로콜리를 사 와 썰다가 갑자기 벌레가 튀어나와 소리를 지르며 놀란적이 있었다. 사실 다 자연의 한 부분인데 나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놀란 건지 도마 위를 기는 그 벌레를 밖으로 보내주며 괜히 머쓱해서 혼자 실실 웃었었다.


흙이 생소한 것도 나의 상실감에 한 몫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방 창문 너머에 넓게 퍼진 나의 밭을 갈망하는 나는 여러 번 흙에 익숙해지기를 도전했었다. 집에 있는 식물들 분갈이를 하거나 봄의 끝자락에 바질이나 파슬리 씨앗을 심는데, 흙을 만질 때마다 어쩐지 더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손톱 사이에 낀 검은흙을 꼼꼼히 긁어내며 내 손이 다른 사람들에게 깨끗해 보이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생명이 자라나는 근본인 흙이 어쩌다가 병균의 온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고정관념이 얼마나 크고 깊게 머릿속에 자리 잡아 왔는지 놀라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흙과 가까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가 지날수록 더욱 강해진다. 나는 직접 기른 채소를 따다가 요리를 하고 싶고 그렇게 자연과 가까이 단순하고 고요하게 지내고 싶다. 완벽하게 예쁘지 않고 깨끗하지 않아도 소박하고 정겨운 그런 주방에서 요리하며 늙고 싶다. 이젠 채소들을 씻기 전 항상 먼저 혹시 벌이나 다른 벌레들이 숨어있지는 않나 조심스레 확인한다. 물에 담그기 전 잠들어 있던 곤충이나 지렁이를 꺼내 바깥 나무들 사이로 던져 주며 자연의 순환에 한 부분이나마 내 자리가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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