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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op Nov 19. 2019

생에 첫 풀마라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돌이켜보면 난 달리는 것을 늘 좋아하는 편이었다.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만 가득하게 느껴지던 나날들에 나는 퇴근 후 뛰러 나갔다. 겨울밤의 푸른 달빛을 조용히 머금고 있는 호수공원 주변을 돌고 돌면서 나는 그날의 하소연과 불평불만이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며 달렸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최근 들어 규칙적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규칙적이라 하면 일주일에 총 50km. 좀 부지런히 달린 주에는 80km 정도. 달리는 거리는 점점 늘어났다. 5km, 10km, 15km. 달리다 보니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원래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단기간에 활활 불태우는 성격인 편이다. 여태 내 삶에서 마라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올 해가 끝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도전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내게 세상은 단 두 분류로 나뉘었다. 마라톤을 완주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지난달 첫 하프마라톤에 참가하였다. 21.0975km의 거리와 1시간 33분이라는 기록. 의외로 수월하게 완주하였다. ‘지금 뛴 거 한 번만 더 뛰면 풀 마라톤이네’. 하프마라톤을 완주한 그 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마라톤 대회 일정을 검색하였고, 풀 마라톤 대회에 바로 신청하였다. 날짜는 정해졌다. 그때부터는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


2019년 11월 17일 일요일,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 당일. 날이 흐리고 다소 쌀쌀한 날씨였지만 이른 아침 시간부터 잠실운동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몸과 긴장을 풀고 있었다. 초콜릿 바를 배어물면서 나 역시 간단히 뛰어다니며 몸을 풀었다. 스타디움 안에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진행자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0km 참가자들이 출발하고 나서, 풀코스 참가자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스타트 라인 앞에 서기 위해 인파 속으로 파묻혔다. 시작하기 직전의 즐거움과 열기에 모두가 들떠있었다. 나 역시 그러했다. 매우 즐거웠고 웃음이 났다. 이때까지는.


시작은 순조로웠다. 달리는 몸에서 열이 나면서 땀이 흐를만하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달래주는 아주 쾌적한 날씨였다. 잠실운동장을 나와 한강변을 따라 암사, 하남 방향으로 달리는 코스였다. 시원하게 펼쳐진 한강과 그 위로 솟은 서울의 도심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10km가 금방 지나갔다. 매우 순조로운 달리기였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첫 도전이 신기록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생에 첫 마라톤을 달리고 있었고, 동시에 신기록을 세우는 중이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달콤한 성취감이 두뇌로 강하게 올라왔다. 나는 그 달콤함에 젖어 실실 웃음이 났다. 속도를 높여 더 빨리 달려 나가며 거리를 쌓아나갔다. 한 명, 한 명 제쳐나가면서.


덕풍교 부근의 1차 반환점을 돌고 미사대교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고비가 찾아왔다. 흐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한강변 바로 옆을 달리는 코스인지라 거친 바람을 피할 길이 없었다. 몸이 추위에 급격히 떨리기 시작하였고, 웅덩이를 밟아 젖은 신발은 무거웠다. 나는 금방 방전됐다. 여기서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매우 괴롭고 괴로운 긴 달리기였다는 기억만이 날 뿐. 달리고 달려도 거리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다. 평소에는 매우 가볍게 달리던 1km가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진다. 어찌어찌 달리다 보니 30km 지점 사인 간판을 지난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12km. 평소 아침마다 가볍게 달리던 그 거리가 지금은 불가능한 거리로 다가온다. ‘우선 2km만 채우자. 그러면 딱 10km 남는다.’


32km 지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달리기에 대한 지긋지긋함과 반감이 메스꺼움과 함께 올라온다. ‘잠깐 멈출까. 잠깐 멈춰서 토를 좀 할까’ 꾸역꾸역 달리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다리는 어느새 알아서 달리고 있었다. 달리고 있는 것이 ‘기본 모드’인 것 마냥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부지런히 내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달려주고 있구나. 그러자 달리는 중간에 멈추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다. 입 안에서 단맛이 난다. 10km만 더 달리자. 그때부터 확신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라도 어떻게든 이 달리기를 완주하리란 것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2호선 열차 안. 좌석에 몸을 파묻는다. 쉬지 않고 내내 고생한 건 두 다리인데, 거친 스파링 상대를 만나 10라운드 내내 질질 끌려다니며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쑤셔왔다. 열차가 길고 가느다란 잠실대교와 올림픽대교 사이 한강 위를 지나간다. 창 밖을 내다본다. 다리 아래로 오늘 달렸던 한강변 코스가 내려다보인다. 잠시나마 몸이 내짖는 고통을 잊고 괜스레 실실 웃음이 나온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풀마라톤 달리기의 고통도 몇 시간만 지속됐을 뿐이다. 지금의 이 달콤한 성취감도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생에 첫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것은 매우 기쁘지만 그건 별 다른 의미 없다. 42.195km의 거리를, 3시간 35분의 달리기를 했을 뿐이다. 그저 길고 긴 달리기, 딱 그뿐이다. 난 내 일상과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불안과 불확실함이 가득한 곳으로. 어쩌랴, 그저 달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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