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물결이 인그타그램을 통해 공개한 이미지 모습 일부.
요즘처럼 현대의학이 발달한 시대에 1기 암쯤은 병원에선 암 취급도 못받는다.
하지만 그건 의학 전문가들의 시선이지.. '내 일'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암은 어찌되었건 아직까지 인류가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한 두려운 질병이며, 그 것이 내 몸에서 시작되었다는 건 어찌되었건 개인에게는 끔찍한 공포를 안겨주게 된다.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죽음이란 단어를 내 삶에 끌어들이게 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말이다.
죽음을 생각하게 된 계기
건강검진을 하면서 우연찮게 초기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들은 수술만 하면 100% 살 수 있으며 걱정할 건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 역시 주변사람과 가족들에게 걱정할 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무서웠다.
'CT를 찍고 만일 전이가 됐다면 어쩌지. 젊을수록 전이가 빠르다던데 괜찮은건지. 수술 과정에서 있을 변수는 없을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한 채 살아가던 때 나는 길을 걸어가는 모든이들을 부러워했다.
살면서 한번도 부럽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던, 더 이상 삶의 이유는 없을 것이라 여기며 불쌍하다 생각했던 보잘것 없이 보이는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들 조차 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저들은 아마도 자식이 다 커서 결혼한 모습도 봤겠지. 내 딸이 커서 결혼하는 모습까진 보고싶다..'
수술 중 불행히도 큰 사고를 겪게됐지만 다행스럽게도 회복을 했고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 프리즘엔 큰 변화가 생겼다.
노인과 청년, 누구 삶이 더 가치로울까
병동생활을 하면서 어릴적 어떤 책에선가 본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무나 어렴풋해서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기억의 파편을 맞춰보면, 거대한 재해의 상황에서 촌각을 다투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제한된 공간 안에 갇혀 있었다. 인물 구성은 아이, 노인, 범죄자, 중년의 여성, 청년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지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던 듯 하다.
누가 더 살아 남기에 가치로울까.
순전히 사회적인 판단이다. 개인의 기준으로 보면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을 우선으로 하며, 더 살고싶어 한다. 이건 거역할 수 없는 본능이다.
암병동에서 만난 대부분의 노인들은 죽어가는 상황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차마 자식들에게 그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며 울기도 하고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 앞에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위안받고자 했다.
노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란 건 젊은이들의 무지이며,
범죄자가 더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오만이며,(중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성별의 차이, 국적의 차이, 나이의 차이, 가진 것의 차이로 인해 누구의 삶이 더 가치롭고 덜 가치롭다 판단하는 것은 무지와 오만이 극에 달한 모습일 뿐이다.
절대값으로서 생명은 궁극적인 그 무엇이다.
살아있는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침해한다면 그 역시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을 수 있음을 표현하는 것과 다름없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
재벌 회장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중년 여성의 삶 중에서 누구의 삶이 더 가치로웠다고 경중을 감히 누가 따질 수 있을까. 주어진 내 하루를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그 안에서 여유의 공간을 두며 남을 위해 좀 더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썼다면 그건 정말 가치로운 인생일 것이다. 이건 감히 타인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동물의 삶이라고 다를까. 동물의 시선에서 인간의 삶은 나와 다른 생명체의 삶과 다름이 아니다. 떠돌이 강아지가 길 위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하루가 내 하루 보다 가치롭지 못하다는 건 순전히 이기적인 인간의 발상일 뿐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선택해 태어난 생명체는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다.
어찌어찌해 지구에 어떠한 형태의 육신을 빌어 생명을 얻어 태어나게 됐고, 그 육신의 한계에 갇혀 먹이사슬 고리에 쳐해진 위치 안에 굴복한 채 한 생애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게 우리가 처한 운명이다.
그게 인간이든, 동물이든.
동물의 고통과 죽음으로 만든 옷과 가방
과연 인간은 그럴 권리가 있는 생명체인걸까.
나도 인간이기에 당장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라면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나와 내새끼 입에 풀칠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문제라면 말이다.
하지만..
야들야들하고 보드라운 가죽의 가방과 신발을 가지고 싶단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체도 되지 못한 어린 송아지는 희생돼야 마땅한 것이었을까.
고통을 다 느끼는 채로 다리와 목을 묶인 채, 가슴과 배의 털을 뽑히며 때론 살점이 떨어져 나가야 했던 거위는 그렇게 자신이 목숨과 바꾼 털이 인간의 베개와 이불 그리고 잠바에 들어가 쓰인다는 걸 알게되면 어떤 심정을 느낄까.
지능이 높은 문어과에 속한다는 낙지는 산채로 인간의 입 속에 들어가면서 과연 어떠한 극한 공포를 느꼈을까.
확인된 바는 없지만 내가 들은 가장 잔인한 이야기는 살아 있는 원숭이 뇌를 먹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싱싱한 뇌를 먹고 싶은 인간의 탐욕으로 살아 있는 원숭이를 묶어 둔 채 머리의 뼈를 잘라 뇌에 간을 해서 바로 회처럼 먹는 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까지 들었다.
생명은 존귀하다는 게 당연한 세상
인간에게 저럴 권리가 과연 있는 것일까.
구스다운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SNS의 동물단체가 전한 메시지를 통해 거위의 비참한 삶을 알게됐다. 고작 따뜻한 이불하나 덮자고 살아있는 생명체의 발을 묶고 목을 짓누르며 깃털을 뽑아 살점까지 뜯어내야 할 일이었을까. 솜이불을 덮어도 인간은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는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었나..
마음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장기가 찢어지는 바람에 복수가 차고 온몸에 염증이 번지며 죽을수도 있는 고통을 느껴본 후, 생명체들이 느낄 육신의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그리고 그 고통의 끝이 비참한 죽음이라면.. 자신의 선택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삶을 착취 속에 살다 떠난 그 삶이 너무 애처로웠다.
이런 마음 조차 이율배반적이고 비겁하다 여겨질 만큼 나역시 문명에 깊숙히 파고들어 살고 있는 욕망가득한 인간으로서 당장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이 현실 앞에 마음이 한번 더 무거워지는 밤이다.
하나하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봐야겠다.
생명은 우리가 이렇게 함부로 대하기엔 너무나 존귀한 존재이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가치가 당연한 가치가 아니었듯,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말 역시 현재로는 모든이들이 받아들이는 당연한 가치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 가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인간의 삶이 나아지는 만큼 동물의 삶 역시 조금씩은 나아지는 게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