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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시 Dec 30. 2022

누구를 위한 재롱잔치인가

태어난지 18개월이 된 내 딸은 어린이집에 다닌다. 아직 말을 못해 좀 불안하지만 그래도 여차여차 잘 적응해 다니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12월 마지막 주 평일 저녁에 어린이집에서 '한해 보내기 행사'를 한다는 공지를 받았다.

올해로 정년퇴임을 맞이하는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의 퇴임식과 함께 아이들 재롱잔치도 이어진다고 했다.

우리 아이는 가장 어린 나이인 2세반 아이로 대부분 아이들이 제대로 재롱잔치를 할 발달 단계는 아니어서 그냥 엄마와 함께 나가서 마라카스나 딸랑이를 흔들다 내려오면 된다고 하셨다.


별일이 아니긴했지만 괜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이 일을 어린이집 선생님인 내 절친과 이야기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인 내 친구는 재롱잔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하라고 해서 하지만, 어린 애들이 그걸 연습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또 그걸 강제로 시켜야 하는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몰라."


아..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질 못했다.

귀엽게 율동과 노래를 하는 결과물만 접하는 부모의 입장인 나는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선생님들은 업무 스트레스가 얼마나 가중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재롱잔치에 대해선 유독 아이의 의사를 물은 적이 없다.

춤 추고 노래하는 게 좋은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서 있는 게 좋은지, 무엇보다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떨고 싶은지.


자기주도식 이유식을 하고 신발과 옷을 선택할 권리를 주고, 장난감을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면서 교구장에 다양한 장난감을 진열해놓으며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한다고 했는데 정작 어른들은 아이에게 중요한 선택에 앞서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물론 아직 어리고 미숙한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마냥 맡길 순 없다. 안전과 예의범절을 지켜야하는 선에서 어른들은 아이의 선택권을 잠시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아이가 완전한 독립적 인격체로서 자신을 스스로 지킬 힘이 생길때까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해도 재롱잔치는 안전과 직결된 문제도 예의범절 카테고리 안의 일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 아이는 트니트니(아이들이 다니는 신체활동 문화센터 일종)만 가도 너무 무서워서 매번 15분은 울면서 엄마한테 안겨만 있는 쫄보 중의 상쫄보 성향 아이다. 그런 아이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재롱잔치를 매년 해내야만 한다면 참 공포스러운 일일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 극복해가는 과정이 필요하겠다만 그 과정이 반드시 재롱잔치를 강제로 치러야만 하는 일이어야 할까.


선생님 입장에서도 아이에게 강제로 율동을 외우게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학부모 앞에서 반드시 제대로 된 공연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연출가적 의무를 지우는 것 역시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하루 일과 중 대부부분을 선생님과 보내는게 아이들인데, 선생님의 스트레스가 아이들에게 전해지지 않을리 없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발간한 책에선 '어린이집 행복선언' 이란 내용이 첫 장에 적혀 있다.



1. 마음껏 신나게 놀고 나면 행복해요. 놀 곳과 놀 시간을 주세요.
2. 포근하게 안아주면 행복해요. 많이 많이 안아주세요.
3. 하늘을 보고 꽃을 보면 행복해요. 자연과 더불어 살게 해주세요.
4.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요. 좋은 먹거리를 많이 주세요.
5. 책을 읽어줄 때 행복해요. 재미있는 책을 읽어주세요.
6. 어른들이 기다려 줄 때 행복해요. 잘 못하고 느려도 기다려 주세요.
7. 제 말을 귀담아 들어줄 때 행복해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8. 제 힘으로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해요. 저 혼자 할 수 있게 해주세요.
9. 어른들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해요. 모두 함께 행복하게 해주세요.
10. 다른 아이들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해요. 모든 아이들이 저 처럼 행복하게 해주세요.


물론 개중에는 앞에서 나가 춤추고 노래하는 걸 즐기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는게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가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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