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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vion

점보 이야기

하늘의 여왕(the Queen of Sky)에 붙은 별명의 유래

by 박지욱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주국제공항(CJU)에도 대한항공의 '점보 제트 여객기(Jumbo Jetliner)'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점보기'는 보잉사가 만든 747 여객기의 별명이다.


대한항공이 A-380 을 들여와(2016년 3월 현재 10대) 점보가 날아다니던 하늘 길을 이어받자 그 자리를 내어준 점보들은 국내선 최장 구간인 서울~제주 노선에도 투입되어 주말에 한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동시에 3대나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제주국제공항이 정말 비좁아 보인다.

주기장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점보, 토잉카에 뒤로 스르르 밀리는 점보, 활주로를 내달려 우아하게 이륙하는 점보를 보면 매끈한 유선형의 고래가 떠오르지만, 사실 점보라는 이름은 아주 유명한 코끼리의 이름이었다.


1864년, 런던동물원에 아프리카 코끼리 한 마리가 들어왔다. 이 코끼리는 1862년에 아프리카 북동부지역에서 생포된 코끼리로 생포 당시에 1~2세로 키가 1미터 정도인 아기 코끼리였다.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 발을 디딘 최초의 아프리카 코끼리란 타이틀을 얻어 파리동물원에서 3년을 지냈고, 코뿔소와 맞교환되어 1865년에 런던동물원으로 옮겼다. 그동안에 '점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점보 그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아프리카 스와힐리어 말로 '안녕' 정도인 '잠보'나, '대장'을 뜻하는 '점베'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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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보. 위키백과사전 자료


런던 도착 당시 키가 이미 3.3미터를 넘고, 몸무게는 5톤을 넘는 육중한 코끼리였던 탓에 사람들은 점보를 '뚱뚱보'의 대명사로 썼다. 하지만 이렇게 큰 코끼리의 등위에 태우면 동벌이가 되지 않을까?

점보의 주인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2펜스를 내면 점보의 등위에 앉아 동물원을 어술렁 거리며 걷는 체험을 하게 했다. 2펜스를 더 내면 '과자를 주며는코로 받는'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코끼리의 재롱잔치를 보는 것보다 체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꼬맹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점보와 놀려고 부모들을 졸랐다. 최초의 동물 슈퍼스타는 이렇게 탄생했다.

16년 동안 잘 지냈는데, 위기가 왔다. 사람과 비슷한 수명을 가진 코끼리인지라 스무 살 정도가 된 1861년부터 '사춘기'가 찾아왔다. 영원한 아기 코끼리로 우리 속에 가두어져야할 점보지만 유전자의 마스터플랜에 따라 테스토스테론이 핏속으로 쏟아져 나오자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꼬맹이들도 변성기에 접어들고 화를 낼 때가 되면 어른들은 '중2병'이야라며 한 발 뒷걸음 쳐야 하는데, 대초원에서 사자를 밟아죽일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아프리카 숫코끼리라면 사람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점보의 주인에겐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평화롭게 동물원을 어술렁 거리는 점보, 과자를 코로 받아먹으며 웃어주는 점보가 아닌 아프리카 숫코끼리는 더 이상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별 망설임 없이 점보를 미국 최대의 동물 서커스단인 <바넘 앤 베일리>에 팔아버렸다.

점보가 미국으로 팔려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영국이 들썩거렸다. 일본 전자회사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처럼, 영국의 자랑거리가 애송이 신생국인 미국에게 팔려가다니!

영국 전역에서 매각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꼬맹이들은 서툰 글씨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탄원서를 썼다. 하지만 팬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1882년 봄네 코끼리 청년 점보는 가랑잎(?) 타고서 대서양을 건너갔다. 점보에겐 세번 째 대륙이었다.


대서양 뱃길은 보름 정도 걸렸는데 그 동안 점보는 술에 쩔여지냈다. 덩치가 큰 코끼리를 진정시킬 다른 방법이 또 있었을까? 뉴욕항에 도착한 점보는 16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서커스단이 진을 치고 있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상 최대의 쇼'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미국에서도 영국 못지 않게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런던 주인의 걱정과 달리 사사워지지도 않고 고분고분했다. 키도 점점 더 자라 4미터에 육박했다(리무진 버스의 높이는 3.5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뚱뚱이'의 대명사인 점보는 이제 미국에서는 '아주 큰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무대 조명이 꺼지고나면 점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학대와 그 학대를 견디게 해줄 4리터의 위스키였다. 점보는 서서히 '알콜중독 코끼리'가 되어갔다. 뉴욕은 술로 코끼리를 다잡은 것이다.

사납지 않는 점보는 미국으로 건나간 이듬 해부터 시름시를 앓기 시작했다. 점보의 주인은 오래 못 살 것 같은 점보의 '사후처리'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서 철길을 건너던 점보는 달려온 화물열차에 부딪혀 죽고 말았다. 스물 다섯살 점보 코끼리는 1885년 여름에 이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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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보의 죽음. 위키백과사전 자료.


전세계가 최초의 동물 슈퍼스타였던 점보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지만 점보의 주인은 점보의 심장은 코넬대학교에 팔고, 뼈는 추려서 골격 표본을 만들어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서 전시하게 했다. 가죽은 벗겨서 실제보다 조금 더 큰 박제로 만들어 보스턴의 터프츠대학교에 기증했다. 대학은 점보를 학교의 마스코트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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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배구단의 이름도 코끼리 점보.


1941년에 월트 디즈니는 <아기 코끼리 덤보(Dumbo)> 애니메이션을 내놓았다. 서커스단의 엄마 코끼리 '점보'의 새끼인 '점보 쥬니어'의 별명이다. 점보 주니어는 귀가 너무 크고 몸이 둔해서 서커스단 단장이 원하는 곡예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로 멍청이, 바보, 얼간이란 뜻인 '덤보'로 불린 것이다. 철자 하나만 다를 뿐이지만 '대장'이란 뜻에서 온 '점보'와는 뜻이 정 반대다.

하지만 엄마 코끼리 점보의 격려에 힘입어 어찌어찌해서 큰 귀를 이용해 맘껏 하늘을 날게 되어 서커스단의 스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몸치 덤보의 이름은 1940년대에 미 해군에서 사용하던 수색구조기들의 별명에 붙여졌다. 해군은 '보잉사'가 만든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ng Fortress;날으는 요새) 폭격기를 개량해서 해상의 수색 구조기로 썼는데 이것에 '덤보, 플라잉 엘리펀트(Dumbo , Flying Elephant)'라는 별명을 붙였다. 플라잉 포트리스와 플라잉 엘리펀트, 운이 약간 맞는 것도 같다.

나중에는 해상 수색 구조 임무를 아예 '덤보 임무(Dumbo mission)'이라 불렀고 이런 임무를 도맡은 비행정이나 SB-29 플라잉 슈퍼 포트리스같은 해상 수색 구조기들을 기종 구별없이 모두 덤보로 불렀다(625전쟁에 투입된 덤보는 SB-29 로 B-29 폭격기의 개조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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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보기로 쓰인 보잉 SB-17G. 위키백과사전 자료.

1969년에 보잉사는 역사상 가장 큰 제트여객기 보잉 747 을 를 개발해 띄웠다. 기존의 대형 여객기였던 보잉 707에 비해 무게가 두 배, 최초의 광동체 (복도 2줄이나 될 정도로 폭이 넓은 동체) 여객기였고, 3세대 제트 여객기로 승객을 374명이나 태울 수 있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큰 초대형 여객기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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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보잉사가 미리 준비한 별명은 '슈퍼 에어버스(Super Airbus)'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 언론사가 '엄청나게 큰' 점보를 떠올리게 한다고 '점보'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것이 유명해져 아예 그것으로 굳어졌단다.

지금도 점보 제트기, 점보 택시, 점보 기저기, 점보 버그, 점보 세트, 등등.. 에 점보는 아주 널리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코끼리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들이 어렸을 때 빨간 램프가 켜지고 엔진소리가 나는 장난감 여객기 한 대를 사주었다. 물론 '점보 제트'다. 지금도 장난감 가게에 가면 제일 흔하고 눈에 띄는 것은 콩코드도, A380도, B777 도 아닌 여전히 점보 제트다. 점보 코끼리는 벌써 죽었지만 점보 제트기는 여전히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완전히 혁신적인 제트여객기가 나오지 않는 한 점보의 명성은 아마 한 세대는 더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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