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는 비행, 땅에서는 뇌에 열정을 바친 비행사 겸 의사
콘스탄틴 폰 에코노모
하늘과 뇌에 열정을 바친 인물
따르릉
여보세요?
아, 박사님 댁이죠?
네, 그런데요.
아침 출근 전에 죄송합니다. 병원에서 급한 일로 박사님과 통화 좀 하려구요.
아, 네, 그런데 지금은 통화가 어려운데요.
급한 일인데…잠깐이면 됩니다.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글쎄…그게… 조금 전에 하늘로 가셨거든요.
네? 돌아가셨다구요???
아니, 그게 아니고 한 바퀴 돌고 오신다고 … 진짜 하늘로 가셨어요. 2시간 후엔 돌아오십니다.
출근 전에 동네 한바퀴가 아닌 ‘하늘’ 한바퀴 돌고 오는 의사가 있었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도 100년 전에 말입니다. 물론 앞의 대화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런 특별한 재주를 가진 의사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얼른 그 이름부터 알려드리면 콘스탄틴 알렉산더 폰 에코노모(Constantin Alexander von Economo/Κωνσταντίνος Οικονόμου; 1876~1931)입니다.
폰 에코노모는 1876년에 지금은 루마니아 땅에서 그리스인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 한 살 때부터는 지금은 이탈리아 땅인 아드리아해의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자랍니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체험하며 자란 덕분에 아버지와는 그리스어, 어머니와는 독일어, 동생들과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할 정도가 됩니다.
대학은 아버지의 소망대로 기계 공학자가 되기 위해 <비엔나기술대학(Technische Universität Wien Polytechnicthe Polytechnic University of Vienna)>에 입학합니다. 몇 년을 다니기는 했지만 문학, 예술, 자연, 여인을 사랑했던 ‘자유로운 영혼’은 기계에 붙잡히기를 거부합니다. 대신 범죄심리학에 심취해 인간의 광기와 뇌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2년 만에 그만두고 유럽 최고 수준의 비엔나대학교 의대로 옮깁니다(1895년). 학교 다니는 동안에 비엔나 중심가에 있는 유명한 자허호텔(Hotel Sacher)에서 기숙했다 합니다(그는 부자집 아들이니까요). 25세인 1901년에 학업을 마칩니다.
1903년부터 내과 수련의로 일했지만 곧 그만 둡니다. 대신 유럽 각지를 떠돌며 최고의 신경-정신의학자들을 찾아다닙니다. 파리, 낭시, 스트라스부르, 뮌헨, 베를린, 트리에스테에서 유학을 합니다. 2년의 해외연수(?)를 마치고 비엔나로 돌아온 폰 에코노모는 비엔나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에서 일합니다. 이렇게 의사로 자리를 잡나 싶었는데 2년 후(1907년)다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기계’입니다. 이번에는 하늘은 나는 기계였죠.
당장 날고 싶은 그의 열망과 달리 그때가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에는 비행기라곤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라이트형제가 유인동력비행에 성공한 것이 불과 3-4년 전의 일이었으니까요. 항공 역사가 이제 막 열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기구(氣毬; balloon) 조종술을 배웁니다. 하지만 기구에 만족할 폰 에코노모가 아닙니다 프랑스 유학까지 가서 비행기 조종사 교육을 받지요.
조종사가 된 이상 자신의 비행기도 필요했겠죠? 당시로서는 고가의 비행기를 남에게 빌려주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초창기 비행기인 브와쟁(Voisin)기도 마련했고 그 비행기를 몰고 비엔나까지 날아갑니다. 이렇게 폰 에코노모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조종사가 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항공클럽 회장도 16년 동안 맡습니다. 한창 때는 비행기도 여러 대 가졌고, 비엔나 남북에 하나씩 비행장도 만듭니다(Wiener – Neustadt 와 Aspern).
하지만 비행지 조종은 일종의 취미입니다. 본업은 의사이지요. 병원 근무는 9~5시이므로 그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한두 시간 비행을 한 후 9시에 병원으로 출근했습니다. 5시에 퇴근하면 항공클럽에 가서 회장으로 업무 처리에 매진했죠. 항공 후발국인 오스트리아에 국제 항공 대회도 유치하는 등의 노력으로 국제 항공계의 명사가 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쟁이 터집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당장 군에 자원입대합니다. 하지만 ‘군의관’이 아닌 ‘조종사’로 말입니다. 그런데 48세나 되는 그를 험악한 공중전에 내보내기 싫었던지 군은 그에게 이제 출범한 공군의 조종사 양성 ‘교관’으로 후방에서 복무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전선으로 보내 달라고 계속 요청합니다. 그러자 군은 폰 에코노모를 동부전선의 수송부대로 보냅니다. 비행기가 아니라 자신의 자가용을 가지고 복부하는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한 그가 아니지요. 포기하지 않고 전선의 조종사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1916년 3월에 서부전선 정찰기 조종사로 배속되어 날개를 펴고 남 티놀(Tyrol)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어쩌면 미국인 청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지도 모릅니다. 전선 건너편에서 청년 헤밍웨이는 구급차를 운전했으니까요. 그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이곳이 배경입니다.
비행이 없는 날에는 군의관으로 일합니다. 그리고 근처에서 포병으로 복무하던 동생도 만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6월에 동생이 죽자 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부모님도 남은 아들도 전쟁으로 잃을까 걱정이 커집니다. 그에게 당장 조종사를 그만두고 다른 의사들처럼 군의관으로 복무하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흔들린 폰 에코노모는 비엔나로 귀환해 머리에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는 군의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아주 특이한 뇌염 환자를 만납니다.
폰 에코노모는 1917년에 발열, 의식저하, 안구운동 마비를 보이는 뇌염을 발견합니다. 특이하게도 젊은이들이 잘 걸렸습니다. 이러한 질병은 이제껏 알려진 적이 없기에 그는 ‘기면성 뇌염(Encephalitis lethargica; 의식이 쳐지는 뇌염이란 뜻)’으로 명명하고 학회에 보고합니다. 지금은 ‘폰 에코노모 뇌염’으로도 부릅니다. 이 병은 40년이 지나 미국 신경과의사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hs)가 책 <깨어남(Awakening)>에서 소환합니다. 동명의 영화도 나왔는데, 우리나라에는 <사랑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습니다. 보시면 이 뇌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제가 쓴 글을 보시면 내용을 간략히 알 수 있습니다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A7%88%EB%B3%91%EC%97%90%EC%84%9C-%EA%B9%A8%EC%96%B4%EB%82%9C-%ED%99%98%EC%9E%90%EB%93%A4-%EC%9D%B4%EC%95%BC%EA%B8%B0/)
한편으로는 귀족 가문의 여성과 결혼도 했고, 1921년에는 비엔나 의대의 정교수도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교계를 드나들고 미술관과 오페라극장의 단골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아테네, 프랑크푸르트, 뮌헨, 취리히 등지에서 날아온 교수 임용 제안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비엔나 상류 사회를 떠나기도 싫고, 학교에 얽매여 살기도 싫고…
하지만 심심풀이로 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병원에 나갈 때면 엄청난 열정으로 뇌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1925년에는 13년간의 뇌 연구 결실을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펴냈습니다(일생 동안 쓴 논문과 책이 모두 150개나 됩니다). 하늘에서는 비행, 당에서는 뇌에 열정을 바친 사람입니다.
1931년에는 대학의 뇌 연구소장도 됩니다. 하지만 봄에 과로로 병원에 입원한 후 여러 차례 협심증과 뇌졸중 발작을 겪으면서 병세는 점점 더 나빠집니다. 베른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신경학회에 참석하여 신경과와 정신과를 분리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려 했지만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10월에 파란만장했던 지상의 삶을 뒤로하고 영원히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향년 55세). 묘지는 어릴 때 자란 트리에스테에 있고 비엔나대학에는 그의 흉상이 남아있다 합니다.
남겨진 사진 속에 나오는 폰 에코노모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쳐진 눈, 멋진 수염이 보입니다. 적어도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재치 넘치며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합니다. 뇌와 하늘에 골고루 영정을 바친 폰 에코노모, 참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