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vion

DC-3 이야기.

20세기 중반을 대표했던 베스트셀러의 이야기

by 박지욱


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오후, 인천 인하대학교 교정에는 햇살이 따갑다. 불시에 이 도시에 상륙한 여름의 열기를 피해 사람들은 교정 곳곳에 흩어져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 숨었다. 햇살이 장악한 교정 한복판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색 동체의 DC-3을 나는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열다섯 살 때 여기서 이 비행기를 처음 보았다. 그때는 '학교 안에 비행기가 있구나!'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실물 비행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자세히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비행기가 생각이 났지만 기회를 찾지 못했다가 35년 만에 이 비행기를 다시 만나러 왔다.



DSC_0767.JPG DC-3. 인하대교정. ©박지욱.

20세기 중반을 대표한 여객-수송기인 DC-3는 당대 최고의 성능을 갖춘, 테크놀로지의 결정판이었다고 ‘과거완료형’으로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사실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다. 보잉 여객기의 인테리어를 도맡았던 미국의 산업 디자이너 월터 티그(Walter D Teague)는 “짧은 포물선과 긴 곡선, 직선과 조금 휘어진 직선 등으로 이루어진 이 항공기의 선은 힘과 우아함을 나타낸다. 이보다 더 사람을 흥분시키는 현대 디자인은 결코 없다”고 했다.

DC-3 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보았을 때,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크기 때문인지 몰라도 무척 수수하고, 고전적이면서도 편해보이는 비행기라고 느꼈다. B747 이나 A380 같은 최근의 대형 여객기들은 한꺼번에 수백 명의 사람을 실고 날아다니다 보니 인간은 그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위축되는 느낌이 큰 데 비하면 DC-3 정도의 여객기라면 거대한 항공 기계라는 느낌보다는 사람을 태우는 비행기, 비행을 경험하게 만드는, 동요 속에 등장하는 친숙한 비행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 전면에 세워둔 스테인리스로 만든 금속제 설명판이 반짝이며 이 비행기의 내력을 알아보자.

DC-3형 여객기.

이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비행기가 주로 목재로 제작되던 것을 1935년 미국의 DOUGLAS항공기 제작회사에서 신 금속제로 만들어 실용화에 성공한 역사적인 수송기이다. 구조가 튼튼하고 성능이 우수하였기 때문에 1946년까지 10,800대가 생산되어 세계각국에서 민간용으로는 물론 군용수송기(C-47)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에 대한국민항공사(KNA)가 2대(창랑호, 만송호)를 도입하여 서울-광주-군산간을 처음 취항하였으며 이 HL-2002호기는 1954년 세번째로 도입된 우남호이다.

1955년 하와이교포1세들의 모국 방문을 위한 우리나라 민항공사상 최초로 태평양횡단비행을 하고 1969년 대한항공(KAL)에 인계되어 총 비행시간 36,216시간이란 기록을 남기고 퇴역한 것을 1974년 본교에 기증하여 영구 보존하게 된 것이다.

주요제원.

날개길이; 29.95m. 동체길이;19.63m. 날개면적; 92m2. 총중량; 11,420Kg. 좌석수;30석. 발동기; P&W1R-1830(1200HPx20. 최대속도; 368Km/H. 항속거리;2,420Km. 상승한도; 7,010m



먼저 ‘DC-3’라는 이름을 알아보자. D는 더글러스(Douglas), C는 코머셜(Commercial)의 줄임말이고, 3은 세 번째 모델란 뜻이다. 더글러스는 1921년에 더글러스(DW Douglas)가 세운 미국의 더글러스 항공기제작사(Douglas Aircraft Company)를 뜻한다. C 는 상용(商用) 모델을 뜻한다. 더글러스 사는 1967년에 맥도넬 항공기제작사(McDonnel Aircraft Company)에 합병되어 맥도넬 더글러스-줄여서 MD-로 변신했다가 1997년에 경쟁사였던 보잉사에 합병되어 76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여객/수송기 DC-3의 이름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DSC_0779.JPG DC-3. 인하대교정. ©박지욱.

B247 의 등장과 유나이티드 에어 라인즈 사(United Air Lines)의 독점 공급으로 몇 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경쟁사인 트랜스월드항공사(Transcontinental and Western Airlines;TWA)는 몸이 달았다(B247 이야기 참고). 하지만 기다릴 수 없었던 TWA 는 1932년부터 운용 중이던 여객기인 포커 사의 트리모터(Fokker F.10 Trimotor)를 대체할, B247를 뛰어넘는 여객기를 개발하기 위해 더글러스 사와 손을 잡고 개발비용을 대기 시작했다.

B247이 워싱턴 주 시애틀의 보잉사 공장에서 날아오른 지 5개월 만인 1933년 7월에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의 더글러스 사 공장에서 의 DC-1 이 이륙했다. B247보다 20% 더 크고, 튼튼한 여객기로 승객도 2명 더 많은 12명을 싣고도 더 빨리 날 수 있었다. 성능에 흡족한 TWA 는 더글러스 사에 25대의 DC-1를 주문했지만 DC-1 은 덩치와 무게에 비해 힘이 딸리는 흠이 있어 추가 생산을 포기하고 개량형 개발을 시작했다.

10개월이 지나 동체도 더 길고, 엔진 출력도 더 키워 탑승 인원도 2명 더 늘여 14명을 태울 수 있는 DC-2 를 개발했다. TWA는 크게 만족하여 20대를 인도받아 운항을 시작했다. 기차로는 90시간, 경쟁사인 유나이티드 에어 라인즈가 B247를 띄어 19시간 걸리는 미국대륙 동서 횡단을 TWA 의 DC-2 는 13시간으로 단축시켰다.

이런 막강한 DC-2 의 등장으로 항공업계 전체가 술렁였다. 네덜란드의 KLM항공사나 스위스항공도 DC-2를 구매했고, KLM 의 DC-2 는 네덜란드와 자카르타 노선같은 장거리 국제노선에 취항했다. DC-2는 모두 198대가 생산되었지만 조종사들이 ‘뻗정다리 짐승’으로 불릴정도로 조종성이 나쁜 단점이 있었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DSC_0359 DC-2.JPG TWA 소속의 DC-2. 시애틀 항공박물관. ©박지욱.
DSC_0513 DC-3 _.JPG

한편 아메리칸 항공사(American Airlines; AA)는 13기간 걸리는 미국 대륙 횡단 노선에 침대칸 여객기를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더글러스 사에 주문을 냈다. 더글러스 사는 동체의 폭과 길이는 더 늘이면서도 한층 더 세련된 첨단 유선형 디자인을 적용하여 속도는 시속 300km나 낼 수 있는 개량형을 내놓았다. 이 비행기는 특히 '옷걸이 모양'의 날개가 특징이었는데 ‘침대칸 비행기’란 뜻의 DST(Douglas Sleeper Transport)로 불렸다. 이것을 21개 좌석으로 내놓은 모델이 DC-3이다. DC-3 의 첫 비행은 1935년 12월 17일로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가 최초의 유인 동력 비행에 성공한 지 정확히 32년 만이었다.

항공사들의 입장에서는 더 나아진 조종성이나 첨단 기능보다 많은 승객을 실을 수 있는 것이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DC-3는 경쟁기종인 B247의 두 배가 넘는 21명의 승객을 태웠고 화물도 50% 더 많이 실을 수 있었다. 여객기 운항 비용은 승객 운임으로도 충당이 될 정도의 채산성도 좋았다.

1936년부터 TWA 의 운항 노선에 취항한 DC-3 는 국내외에서 주문이 쇄도하였고 미국 여객기의 표준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 생산된 지 3년 만인 1939년에 미국 여객기의 75%는 DC-3의 차지였다. DC-3 의 선전은 미국 항공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곧 전통적인 철도 수송을 대신했다.


DSC_0362 DC-3.JPG 알래스카항공 소속의 DC-2. 시애틀 항공박물관. ©박지욱.

DC-3 는 모두 607대가 생산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성이 떨어진 B247은 75대만을 생산하고 단종되고 말았다. 현대 여객기의 시조인 B247 을 물리친 DC-3는 20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여객기이자 현대 여객기의 빠른 발전을 선도한 여객기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더글러스 사는 DC-3를 군용 수송기로 개조하여 미국, 영국, 러시아군에 공급했다. 미국 육군에서는 C-47 스카이트레인(Skytrain), 미국 해군은 R4D, 영국 공군에서는 다코타(Dakota; Douglas Aircraft Company Transport Aircraft), 소련에서 라이선스로 생산된 것은 Li-2 (Lisunove Li-2)로 불렸다. 미국과 연합군의 발진기지를 날아오른 군용 DC-3는 보급품과 병력을 부지런히 실어날라 총력전을 지원했다. 심지어는 공수부대원들이 적진에 투하될 때에도 C-47 이나 다코타에 몸을 실었다. 전후에는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합국측은 C-47 등을 동원한 베를린 공수작전(1948.6.~1949.5)을 폈다.

C-47 은 총 10,174대가 생산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몇 대 남아있어 박물관이나 여의도에서 실제 비행기를 볼 수 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DC-3 나 C-47 가 있다.


C-47_Skytrain_2.jpg 우리 공군에서도 운용한 더글러스 C-47 수송기. 사천항공우주박물관. ©박지욱.



돌이켜보면 베스트셀러 DC-3 의 화려한 등장과 성공은 B247 덕분이다. 만약 B247의 채산성이 컸고, 보잉사가 여러 항공사들의 쇄도하는 주문을 감당할 생산능력이 있었다면 DC-3가 그 시점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개발될 수 있었을까? 유나이티드 에어 라인즈와 TWA 그리고 보잉과 더글러스의 이중경쟁 속에 DC-3 은 태어나고 성공할 수 있었다.

DC-3 을 한 바퀴 빙 둘러본다. 딱딱한 금속 날개는 햇살에 뜨거워졌다. 고무 바퀴는 28년 동안 제자리를 지킨 덕분에 딱딱하게 굳었다. 날개의 플랩 이음세도 헐거워져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보았던 빨간 고니가 그려진 대한항공사의 로고도 보인다.

비장한 각오로 몸을 실은 어린 병사들, 봉쇄된 베를린 시민들에게 보급된 구호 물자, 부상을 당해 후송된 군인들,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국 땅을 밟은 하와이 동포, 청운의 꿈을 안고 고국을 떠나는 유학생들이 이 비행기를 통해 하늘에 날아올랐다. 권력을 빼앗기고 망명 길에 올랐던 초대 대통령, 아니면 하와이에서 숨져 국립묘지에 안장된 그의 유해가 <운남호>에 실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사연과 기억을 뒤로 하고 저 소녀가 내 나이가 될 만큼의 시간 동안 이 비행기는 이 잔디밭에서 먼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다.

그 동안 스테인레스로 만든 설명판도 고색창연하게 되었다. 글자도 지워져 새로 손을 좀 보아야할 형편이다. 그때는 설명도 좀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


더글러스 DC-3 여객기

1935년부터 미국의 더글러스 항공기제작사가 생산한 20세기 중반기를 대표하는 여객/수송기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성능을 갖추어 가장 많은 승객을 태우고 가장 빠른 속도로 날 수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수송기(C-47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로 개조되어 연합군의 수송과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53년까지 16,000여대가 생산된 베스트셀러 여객/수송기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각지의 민항 여객기와 군용 수송기로 사용되었다,

DC-3 은 우리나라 민항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여객기이다. 한국국민항공사(KNA)가 1950년부터 3대를 도입하였다. 그 중 두 대는 1957년과 1958년에 파손(만송호)과 납북(창랑호)되었다. 마지막 한 대 남은 <우남호(HL2002)>는 대한항공(KAL)을 거쳐 36,216시간의 비행 기록을 끝으로 1971년에 퇴역하여 이곳에 영구 보관 전시되고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호를 따서 이름이 붙은 이 여객기는 1958년에 이민 50주년 기념하여 모국 방문하는 하와이 교포들을 수송하였던 역사적인 비행기로 하와이 교포들은 본교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한항공은 미학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DC-3 여객기를 영구 보존 전시하도록 하여 어려운 본교는 물론이고 글로벌 항공사로 도약한 대한항공의 성장과 발전에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700만 재외 동포들의 노고와 사랑을 기념하려 한다.


DSC_0771.JPG DC-3. 인하대교정. ©박지욱.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