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회전 깜빡이 소녀

by 백윤


출근하는 길이면 연희동에서 연남동으로 빠져 동교동 삼거리를 만난다. 1, 2차선은 신촌 방향 차들이 길게 줄을 늘어뜨리고 있고 우측 3차선은 합정으로 빠지는 길인데 널널하다. 신촌으로 향하는 1, 2차선에 어렵게 비집고 들어가 몇 번의 신호에 끊어서 전진, 통과하는 게 마음 급한 차들의 모닝 루틴이다.


오늘도 나는 이 익숙한 도로에 낙엽 사이를 쓰는 한 마리 뱀처럼 수려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3차선으로 주욱 달려오다 얌체처럼 끼어드는 차들이 곧잘 있는데, 길게 늘어선 2차선 차들은 그 순간에는 의협심으로 팀이 되어 앞뒤 간격을 더욱 좁힌다.


파란 불을 받고 신호를 통과하려 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는데, 오른쪽에서 치팅으로 의심되는 검은 suv가 끼어드려고 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그대로 앞으로 갈 것이요, 아마도 너는 어찌나 급한 일이 있을 건지 다 와서 끼어드려는 얌체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굳이 브레이크에 발을 댈 생각을 안 했다. 그때 왼쪽 뒷좌석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소녀. 초등학교 일이 학년쯤 됐을까. 내 앞유리를 바라보며 오른팔을 쭉 뻗어, 껴주기를 부탁한다고 신호를 보냈다.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는 아이의 순수한 부탁. 아이가 나설 정도면 아무래도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메시지를 이해하자마자 소리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와 곧바로 차의 속도를 줄이고 끼어들라는 손짓을 보냈다. 검은 suv는 안전하게 내 앞으로 차선을 옮겼다. 맑은 빛이 감도는 소녀의 애교스러운 수신호. 이런 것을 보면 세상에 욕심부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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