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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윤 Apr 19. 2023

예술 강탈, 세이렌과 오디세우스

한 장 소설 (2017년 작품)


어젯밤에도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제도 역시나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해 노래를 들으러 가는 동안 암벽에 여러 번 머리를 부딪쳤다. 동쪽으로 먹이를 찾으러 갔을 때 아폴론의 태양 빛을 쐬지만 않았어도 눈이 멀지 않았을 테다. 눈이 멀지 않았으면 무리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테다.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지금 세이렌의 구역에 갇히지도 않았을 테다.


다른 바다로 가고 싶지만, 노랫소리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돌고래는 원래 길을 잘 찾는다고 하지만, 나는 눈이 먼 데다가 이 구역을 벗어날 때쯤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 멀리 헤엄치지 못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동네는 세이렌이 잡아먹고 남긴 인간의 고깃덩이가 물속에서 썩어 냄새가 지독하다. 하지만 노랫소리가 있어서 그나마 견딜만하다. 사이렌이 뱃사람들을 유혹하느라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암벽에 머리를 부딪쳐가면서 그녀들을 향해 열심히 구애를 하고 있었다. 비록 암벽 밑을 내려다봐주지는 않지만, 노래를 듣는 순간이면 고기 썩은 냄새도 전부 다 잊고 나는 황홀경에 빠지게 됐다.


태양이 하늘 높은 곳에서 서쪽으로 기울 때쯤 먹이를 찾아 사이렌의 구역에서 조금 벗어난 곳을 헤엄치고 있었다. 날치 떼가 몰려오는 것을 알고 암초 뒤에 숨어있을 때 배 하나가 내 몸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튼튼하고 두터운 배 위로 선장이 무어라 소리 지르고 있었다. 선장의 고함 때문에 날치 떼가 다 도망가 화가 난 나는 선장의 얼굴에 물을 끼얹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선장은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기에도 두터운 광대에 깊은 눈을 가진, 영웅의 얼굴을 한 사내였다.


“내가 지금부터 밀랍을 이겨내 너희들 귀에 발라 줄 것이다. 세이렌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전까지 절대로 밀랍을 떼어내지 마라. 그리고 나를 저 기둥에 묶어라. 내가 밧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하면 내 몸에 밧줄을 더 묶어라. 세이렌에게서 떨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그때 날 묶어 둔 밧줄을 풀고 너희들 귀의 밀랍도 떼어내라.”


영웅은 세이렌의 노래를 극복하고 내가 사는 바다를 지나가려고 했다. 세이렌을 극복하려던 수 십 명의 선장들을 봤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영웅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물을 끼얹고 싶었지만, 사냥당할까 싶어 그러지 않았다. 다른 먹이를 찾기 위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사냥에 성공해 먹이를 먹고 있을 때쯤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세이렌이 영웅의 배를 유혹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한번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리어 세이렌이 있는 쪽으로 미친 듯이 헤엄쳤다. 암벽에 머리를 부딪쳐 멍이 들어도 나는 헤엄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달렸다. 세이렌의 암벽에 도달했을 찰나,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멈췄다. 노랫소리가 멈췄으니 뱃사공들이 바다에 빠졌어야 했다. 그런데 배의 노는 계속 저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바다에 빠졌다. 바다에 빠진 건 뱃사공이 아니라, 세이렌들이었다. 나의 여신 세이렌이 바다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헤엄쳐 그녀들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이 먼 나는 그녀들이 있는 위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헤엄치고 몸에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 들쳐 업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몸에 닿지가 않았다. 나는 계속 이리저리 헤엄쳤다. 하지만 그녀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기둥에 스스로를 묶은 영웅은 그녀들의 소리를 독점했다. 뱃사공들에게는 노래를 들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얄팍한 꾀를 부려 혼자만 노래를 듣고 유유히 구역을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노가 저어지는 물결을 따라 영웅의 배에 머리를 박았다. 배가 조금 흔들렸다. 뱃사공 하나가 나를 발견했다.


“큰 물고기 하나가 배에 머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건 물고기가 아니라 돌고래다. 아마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미쳐버린 모양이다. 작살을 가져와라.”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머리를 박았다. 나의 예술을 갈취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열 번째로 배에 머리를 박을 때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몸을 꿰뚫었다. 다시 격렬히 헤엄쳐 머리를 박으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꼬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리가 들렸다. 세이렌의 노랫소리였다. 그녀들처럼 바닷속에 가라앉는 나를 위해, 그녀들이 처음으로 나를 위해 들려주는 노랫소리일 터였다.


나는 계속 가라앉았다. 나의 예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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