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는 향유 거리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내가 깨닫고자 하는 인간의 삶에 완벽이란 건 없다. 완벽은 추구하는 것인데, 이 추구는 매우 신중을 필요로 한다.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얼굴에 칼을 대는 사람, 디자인 한 끗에 목숨을 걸어 몇 날 몇 달 밤을 지새우는 사람, 완벽한 좌우대칭을 찾고자 수백 번 테이크하는 촬영 감독. 수없이 많은 완벽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늘어놓고 보면 차이를 보인다. 내가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수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세상의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나만의 예술 세계. 그 안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이데아 혹은 그 너머의 세계에 당도하기 위한 인간의 작은 날갯짓은 아름답다. 그 날개가 일으키는 작은 바람이 토지 위의 타인들에게 의식 넘어 세계의 풍부함, 이로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비즈니스, 기술, 과학의 경우는 다르다. 과학은 종교처럼 삶 전반의 이데올로기, 세상을 반은 지배하는 판단의 잣대이기에 제외해도 좋다. 말하고자 하는 건 남에게 보이는 것이다. 개념을 다르게 정의했다면 앞의 단어들이 부적절할 수 있다. 논리. 이것들을 꿰뚫은 키워드는 논리다. 세상을 논리로 이해하려고 드는 것. 백 마리의 까마귀가 까맣다는 걸 확인했어도 백 한 마리 째는 다를 수 있다면, 마치 귀납적인 사람보다 한 단계 위의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합리적이고 유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모든 위험에 대처할 수 없다. 까마귀가 백한 번째에 희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백한 번째 까마귀도 까맣다는 걸 반드시 증명하거나, 다른 색이 있다면 어떤 색이 시각 이미지로 들어올지 사전에 확정하고자 한다면, 나 개인의 삶에 그것이 어떤 명분을 주는가? 사실 나는 까마귀의 색에는 관심이 덜 하다. 까마귀의 색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운 것이다.
집 주방을 수리하는 데에 확실에 확실을 더해 기사님과 일정 잡기. 서로 스케줄이 틀어진다면 시간이 돈인 그는 내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 결혼반지 제작 선생님에게 토시 하나 오류 없는 정확한 메시지 전달하기. 내가 번거롭게 한다면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고 우리 관계가 틀어질지도 몰라. 주차도 정직에 정직을 더해, 단연코 연락이 올 일 없도록 주차선 결벽적으로 확인하기. 사람들이 아무리 편하게 대는 곳이라도, 이 건물 주인이 갑작스레 전화해 욕지거리를 퍼부을지도 모른다. 상상에 상상을 무는 스트레스의 연속. 내가 만든 이 혼란의 세계에 대비하고자, 이것이 현실이든 아니든 나는 몇 번의 충격을 삶을 도포하는 막으로 인식하고 이제는 선택도 불가하게 방어적 자세 취하기가 자동화되었다. 당신은 참 꼼꼼하군요. 당신은 오차가 없는 인간입니다. 아니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오차가 있는 인간이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완벽한 척 연기하는 중입니다. 삶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저는 완벽이라는 허상을 포기하고, 이보다 단단하고 속이 꽉 찬 보통 인간의 삶을 살고자 연습 그리고 노력 중입니다. 꼭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