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1전공은 철학이다. 금융회사에서 기획직을 하고 있는데 난 나와 같은 전공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중어중문학, 영문학, 언어학, 문헌정보학과 다른 기술적인 인문학을 한 사람은 많이 보았다. 내 2전공은 심지어 신문방송학과다. 연기를 하고 싶어 고군분투하던 중에 다른 친구들 9할이 경영학 혹은 경제학을 복수전공할 때 나는 당당히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했다.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한 소수 친구들은 대개 방송인이 되고 싶은 게 이유였다. 아, 영화를 하고자 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래 그런 친구들도 있었지... 끝까지 예술에 동참하지 못한 내 부끄러움이 그들을 기억에서 지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난 철학을 전공한 특별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망으로 보냈다. 전공 시험이라고 하는 건 논술형일 경우도 많았지만, 외부 사람이 생각하는 자유롭고 지평을 테스트하는 낭만적인 시험은 없고 대부분 암기 시험이었다. 원서를 읽고 교수님이 알려주는 대로 해석하고 잘 외워서 기술하는 게 A를 받는 기술이었다. 자기 의견을 덧붙이라고 하는데, 이마저도 1안과 2안을 수업에서 알려주고, 두 주장이 왜 상반되고 역사적으로 어떤 학술적 효과를 지니는지 외워 쓰는 것에 불과했다. 잘 외운 친구들은 A를 받았다. 1학년 때는 심지어 수능처럼 빈칸 채워 넣기, 올바른 개념끼리 선으로 잇기, 구몬 학습지에 버금가는 일차원적인 유형도 시험 문제로 나왔다. 수업 시간에 교수가 좌르륵 펼치는 대(大) 서양철학사의 역사를 녹음하거나 그때마다 노트북으로 빠르게 필기해 녹취록을 만드는 게 과제인 수업도 있었다. 그 수업의 교수는 항상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몇 학생들에게 자기 예민함을 어른의 고상함으로, 철학자의 고고함으로 당당히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삐딱하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게 남은 서강대 철학과의 2010년 초반 모습은 그랬다.
내가 철학을 선택한 이유는 첫 번째가 점수 맞춰서 입학한 학부가 인문학부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네 가지 전공 중 이 학년에 올라 골랐어야 했는데, 철학이 가장 남자답다고 생각해서였다. 사학, 국어국문학, 종교학은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 취업에 조금이라도 유리할 것처럼 보이는 게 철학이었다. 역사는 원래 싫어했고 국어국문학은 교사가 되기 위한 전공 같았고, 종교학은 신학처럼 전공해도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 전공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파란색은 남자색 분홍색은 여자색이라고 인식했던 유치원 때처럼 난 스물두 살 때 전공이 풍기는 성(性)적 뉘앙스에 따라 전공을 골랐다.
제일 덜 어이없는 세 번째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버스 창가에 기대어 성남시 분당에서 마포구 대흥역까지 등하교를 하노라면 여러 가지 잡념이 떠올랐다.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기술이 발전한다면 결국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우주에서 손오공이 에네르기파를 쏴서 다른 차원으로 기를 날리고 시공간이 뒤섞이는 짓은 수 억 년 내라면 구현 가능한 것인가? 사후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애초에 인지할 수 있는 개념이며, 삶과 죽음의 개념 짓기는 어느 요소를 기반으로 나누어지는가? 나누어질 수 있는가?
나는 수 없이 질문을 던졌다.
따라서 학교 앞 고깃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희랍 철학 전공 교수님께서 왜 철학을 선택했냐고 했을 때, 점수 맞춰 들어왔고 그중 가장 남자다워서 골랐다고 하기에 어이없는 이유라고 생각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을 정리하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대답했다. 난 불성실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몇 가지 중요한 개념 빼고는 다른 공부 잘했던 학생들만큼 전공 내용이 기억에 남지는 못한다. 하이데거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안에 관해 얘기했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대충 어떤 개념인지 알고,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번역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도만 알고 있다. 노자, 공자, 불교가 말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 왜 인간에게 중요한지도 이미지로는 기억이 난다.
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흥미를 갖지 못했다. 수업 내용이 깊어질수록 재밌어지기는 했는데, 듣다 보면 쉽게 넘어가기엔 여러 해석이 가능한 애매한 구문이 있었다. 난 그런 걸 파고들기 좋아했다. 그러면 당시 내 단짝은 쓸데없는 것에 시간 뺏기지 말고 PPT나 여러 장 더 외우라고 핀잔을 주었다. 난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집을 덜 부렸지만, 내 고집이 싫지 않았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내가 선택한 방법이 더 가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업에서, 일상에서 어떤 어려운 개념이 들이닥쳐도 몇 번 이해를 시도하다 보면 머리에 정리되는 건 철학을 전공한 덕분이다. 그것이 쿼리든, 코딩이든, 금융이든, 마케팅이든 내가 배웠던 수없이 복잡한 개념에 비하면 용어가 어려울 뿐이지, 암호 같은 용어들을 해석하다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게 없었다. 약점은 더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필요한 만큼만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내게는 겉핥기 정도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꽤나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Philo, 사랑한다, Sophy, 지혜를,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 내게 남긴 건 남들보다 조금 더 두꺼운 껍데기였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이러한 기술, 습관, 무어라 불러도 좋다, 인지 방법을 회사에 쏟고 싶지 않다. 회사에서 배우는 것들은 다분히 소모적이다. 축적이 없다. 커리어, 기술의 발전, 능력의 고도화, 여러 좋은 말들이 있지만 내가 은퇴해서 더 직접적으로 삶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무기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삶을 배우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뽑아놓은 사랑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솜뭉치를 억지로 물고 있듯이, 돈벌이를 위한 정보들은 우울, 빈곤, 패배의식이 스며 나오는 편도체의 구멍을 틀어막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철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이렇듯 졸업장에 적히는 전공명 한 줄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배워낸 생각하는 기술을 어디에 써먹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