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은 없었다
11월 말쯤 계약을 하자마자 착공서류준비에 들어갔다.
건물이 들어설 땅에 지질역할조사도 하여 첨부하고 각종 안전기술계약서 등 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다양한 서류들이 요구되었다. 우린 건물 크기가 크지 않기에 착공 서류 제출 후 이틀 남짓해서 승인이 떨어졌다. 공사는 12월 첫 주부터 시작이 됐다. 시공사는 공사기간을 6개월로 잡았는데 작은 공간치고는 길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더 걸렸다. 여름의 땡볕과 장마를 피하기 위해서도 12월에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다.
시공사는 첫 공사의 역사적 현장에 건축주와 설계자 등이 함께 했으면 한다고 했다. 공사의 시작은 ‘규준틀’이라고 건물이 앉힐 지점을 정확하게 체크하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이를 함께 하자고 했다. 당연히 나도 참석하고 싶었으나 아내와 내가 동시에 제주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케어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아내에게 참석을 권유했다. 나야 나중에 또가면 되겠지만 아내에게 그 역사적 현장을 맡기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꼼꼼한 아내가 주로 가게 되었다. 난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일매일 공사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네이버 ‘밴드’에 온라인 공간을 마련했다. 현장소장은 거의 매일 사진으로 진행사항을 올려주셨다. 현장소장은 제주에서 다양한 예술(?)적 건축을 수행하신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고. 좋은 현장소장을 만나는 일도 일종의 행운이 아닐까. 우리나 건축사들도 모두 현장에 자주 갈 수 없기에 이런 자료는 매우 유용했다. 특히, 하루하루의 진행사항을 파악할 수 있어 공부도 되고 흥미롭기까지 했다. 궁금한 사항은 바로 채팅창이나 댓글로 질문들을 올렸다. 다양한 기능을 통해 히스토리도 관리할 수 있었다. 진행사항을 보면서 비로소 건축에 눈이 뜨이기도 했다.
토목공사가 진행됐고 건물의 기초가 되는 바닥 콘크리트 기초 타설이 진행됐다. 곧이어 벽체 등 외단열재가 함께 설치되고 이를 철골로 보강하고 있었다. 공사 시작 한 달도 되지 않아 건물의 뼈대가 완성되고 있었다. 설계 대표님은 기초가 가장 중요한데 이는 공사의 70%가 시행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현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내려가 현장을 살펴보고 각종 궁금한 사항이나 이후 진행사항 그리고 세세한 결정사항 등을 결정하곤 했다. 자세하고 전문적인 사항은 설계 대표님쪽에서 바로바로 전화로 협의 중이라고 했다. 혹자는 현장에 CCTV를 설치하는 등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굳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옆집인 2호 집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해 달라고도 했지만 시공사와의 소통엔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벽체와 지붕까지 철근콘크리트를 타설 하니 1월 말이 되었다. 총 6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에서 3분의 1일 지나고 있었다. 가장 추운 2월에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 걸리긴 했는데 모두들 입을 모아 제주는 괜찮다고 했다. 보통 콘크리트 타설시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제주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특히 2월에 제주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건축은 눈보다는 기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양생기간도 2주 이상 충분히 거치고 1층 건물이라 큰 하중은 없다고 했다. 대표님쪽에서 건물을 최대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쉽게 현장에서 작업할 수 있게끔 설계를 하셨기에 현장 소장님도 결과물이 잘 나올 것이라 하셨다. 이제 날씨가 풀리면서 창호를 골조에 얹히면 공간을 아름답게 다듬는 미장 공사가 시작된다고.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고 진행하면서 주변분들의 자세한 설명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었으나 한 가지 걸리는 지점은 조경과 가구설치였다. 자금이 부족한 관계로 건물 건축만 추진하고 있지 건물 주변과 실제 건물 안쪽에 들어갈 가구들은 고민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건 검도 커뮤니티 커피타임이다. 열심히 운동하고 H대 캠퍼스의 우리의 아지트에서 건축과 교수님은 주옥같은 말씀을 주셨다.
“일반적으로 건폐율이 40%라면 일반 설계사는 건물만 설계를 하곤 하지. 하지만 건축이란 나머지 60% 외부에 대해서도 디자인을 해야 해. 땅이란 건축물만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땅까지 모두 포함하는 거지. 그래서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고민하고 고민해서 실행해. 집을 짓고 나면 다 돈이야. 돈 들어갈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야.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즐긴다는 생각으로 고민해 봐.”
언제나 힘이 되는 말씀이다. 사실 시공사 측에서 공사하는 김에 수영장을 만들면 어떨지 물어왔다. 나중에 완공 후 또다시 공사하는 것보다 함께 진행하면 비용을 50% 줄일 수 있다는 솔깃한 얘기를 하셨다. 나의 로망인 수영장을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다니. 물론 여과기 등 수영장을 제대로 갖춘다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땅을 파고 방수처리 후 타일 정도 까는 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때 전선이나 수도 등도 함께 빼는 작업도 포함해서 말이다.
문득 이런 식으로 하면 비용이 계속 증가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교수님의 말씀도 있고 해서 조경은 이번 공사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실제 살아보고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를 충분히 고려해서 추진한다면 설사 비용이 더 든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지. 아직 우선순위도 뚜렷이 모르기에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가구만 해도 이번 시공 계약에서는 기본 가구 이외에는 제외를 했다. 아일랜드 테이블 등 키친 가구, 테이블이나 책꽂이 등 서재 가구들이 그 대상이다. 아직 현장의 공간 감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어느 위치에 놓을지 생각이 매일매일 바뀌었다. 물론 설계 도면으로 대략적인 크기와 위치는 잡아 놓았다. 왜냐하면 전기 콘센트 위치나 전등 위치에 전기 공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콘센트를 최대한 많이 분포하도록 설계가 되었다.
철골 기초 타설이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공사는 약 4주간 멈춰있었다. 1월 말 시스템 창호 발주를 넣었는데 업체에서 4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본 공사는 직영공사는 아니기에 일정이 늦춰진다고 나에게 금전적 타격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시공사 쪽에서 당황하긴 했던 것 같다. 창호로 벽을 막아야 내부 미장 공사에 들어가나 우선 창호 없이 할 수 있는 공사를 하기로 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단 지붕 공사에 들어갔는데 단순하게 보였던 지붕 공사도 제주의 날씨와 태풍 등을 견디기 위한 구조, 물 빠짐, 디자인 요소 등을 고려하니 적지 않은 손길이 들어갔다. 마지막 작업은 아무래도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서 시스템 창호가 들어와 금속팀이 함께 작업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창호가 들어와서야 마칠 수 있었다. 창호가 붙여지고 내부가 외부와 단절이 되자 공사는 속도를 내었다. 갑자기 진행 사항이 빨라지며 비로소 건물의 내부 형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설계 대표님은 현장에 비교적 만족감을 보이셨다. 제주는 항상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나 이번엔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다고. 현장의 문제는 설계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해왔던 방식으로 손쉽게 하려다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 현장소장은 항상 설계도를 갖고 다니시며 잘 모르거나 협의가 있을 시 대표님께 바로바로 연락을 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가끔 방문하는 현장에서 현장소장도 미쳐 빠뜨리거나 명확하지 않았던 지점이 발견되어 바로 수정보완에 들어가거나 매일 올려주는 사진을 통해서도 미비점이 발견되어 서울과 제주 사이 전화기가 불이 나도록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가끔 현장에서 다른 방식을 제안하거나 실제 진행의 어려움을 토로해 왔다고 했다. 허나 대표님은 언제나 원칙은 설계도대로였다. 시공사는 대표님과 협의가 안될 시에 나에게 직접 연락을 주었다. 그때 나는 언제나 결정은 설계사님이 하십니다고 답변했다. 타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