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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일한 사대생 Jul 07. 2023

Just treat me like a comma,

덜어내기



글쓰기는 글을 작성하는 과정보다, 글을 쓴 뒤 필요 없는 구간을 덜어내는 과정이 훨씬 어렵다.



작성과 동시에 '아 이건 아니지'하고 지워지는 단어도 있고, 초고를 작성할 때는 분명히, 무조건 필요하다고 느껴졌던 구절이 통째로 덜어질 때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종일 업을 한 뒤 완성했다고 보여준 원고에 그의 친구가 대체 어제와 뭐가 달라진 거냐고 묻자 "쉼표를 온점으로 바꾸지 않았나" (였나 쉼표를 추가하지 않았냐였나 암튼)라고 대답한 것 역시 작가들에겐 유명한 일화다.



뭐, '덜어내기'와 엄청 잘 맞는 맥락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가들은 글 쓸 때 단어 하나하나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생각 이상으로 신경 쓴다는 사실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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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살 덜어내기)

미니멀리스트 (물건 덜어내기)

명상 (생각 덜어내기)

디톡스 (노폐물 덜어내기)



이런 유행들도 역시, 모두 '느껴지기에 과한 것'

'필요 없는 것'들을 덜어내려는 트렌드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덜어내기를 적용하는 듯한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한다.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받는 악플 유형 중 하나는 '~가 과해서' 비호감이라는 내용이다. (살이 많은 게 과해서/ 살이 적은 게 과해서/ 표정이 과해서/ 표정이 너무 없는 게 과해서/ 과하게 친절해서 끼 부린다고 / 과하게 불친절해서 갑질한다고 등등등) ​


또한 '정보의 바다'라는 단어 역시 더 이상 긍정적인 느낌만 주진 않는다. 불명확한 정보 속에서 허우적대다 정작 알짜배기 찐정보는 노력을 해야만 알아낼 수 있는 수고로움이 추가됐다. 워낙 방대하다 보니 그렇게 알아낸 정보의 신뢰도를 검증하기 위한 감식안까지 필요해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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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키워드를 보았을 때, 무엇인가에 영감을 받았을 때, 기발하거나 감동적인 글감이 떠올랐을 때 등


우선 글을 주욱 써 내려가는 것은 나처럼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글쟁이들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건 그 방대한 생각을 다듬고, 덜어내며 결국엔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이다. 완성시켜서 비로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해도 추후에 다시 읽어보면 '이게 대체 뭐야' 싶은 일이 항상, 매번 일어나는 건 거의 뭐 당연한 절차다. 시간이 흘러도 손댈 구석이 보이질 않는 완벽한 글을 쓸 능력은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자는 이미 시대를 대표하는 문호이거나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보노보노 中

우리는 어릴 땐 하루빨리 성장하기 위해 영양소를 잔뜩 받아들이며 키를 키우고 살을 늘리고, 부모님 이외의 사람들과 인간관계 폭을 늘리고, 지식을 채우려 끝없는 공부를 하고, 수많은 생각을 하며 본인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한다.


끊임없는 채움의 연속이다. 비우는 법에 대해선 배우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어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인간관계 하나하나를 전부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은 어렸을 때는 내내 '채우는 법'을 배우고, 나이가 든 후부터는 차차 '덜어내기'를 연습하며 늙어가는 것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나에게 "이제 그만 채우고 덜어낼 때야"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이제 그만해도 될 때는 "그만하면 됐다"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내가 나에게 너무 관대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그 기준을 딱 잡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욱 완벽한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유일한사대생 #유일한공간 #글 #덜어내기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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