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늘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과대평가한다. 특히 사랑 앞에서는 더 그렇다.
나는 그녀가 떠나도 괜찮을 줄 알았다. 내 고백이 거절당해도, 친구라는 이름표만 붙이고 있으면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찌질한 자기암시였을 뿐이다. 그 믿음이 얼마나 처참하게 박살 나는지 깨닫는 데는, 딱 네 번의 계절이면 충분했다.
“나… 너 좋아해.”
말은 간단했다. 우리가 친구로 지내온 7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 가볍게 툭 튀어나왔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 카페 안의 에스프레소 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나는 비굴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알아줬으면 해서.”
거짓말이다. 부담 가졌으면 좋겠고, 나를 당장 남자로 봐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는 빨대 포장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걸 본 순간, 내 심장은 이미 빙하기로 접어들었다.
“미안해.”
기다렸던 ‘나도’ 대신 돌아온 건 ‘미안’이라는 사형 선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마치 아무 타격도 입지 않은 사람처럼.
“에이, 괜찮다오. 난 진짜 괜찮아.”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투가 촌스러웠다. 평속 쓰지도 않던 말투로 ‘괜찮다오’라니. 그 말은 자존심이 아니라, 체면이 만든 얇은 거짓말이었소. 그날 이후, 내 세계의 달력은 멈췄다.
그날 이후, 내 달력은 멈췄다.
며칠 뒤, 그녀를 마주쳤다. 말이 좋아 우연이지, 사실 나는 며칠째 그 길을 피해 보려다 결국 그 길로 돌아오고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그녀가 있었다. 초록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그런데 나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안녕.” “잘 가.”
연습했던 인사말들이 목구멍에서 굳어버렸다. 우린 분명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는데. 이 신호등 불빛 하나가, 아니 내 한심한 욕심 하나가 우리 사이를 이토록 갈라놓았나 싶었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신호는 다시 빨간색. 그녀의 뒷모습은 한 점이 되었다가, 결국 소멸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고백하기 전, 그 지루하고도 평온했던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마지막을 배웠다. 붙잡는 법이 아니라, 놓아주는 법을.
초록불인데도, 나는 건너지 못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기 직전의 밤이었다. 술에 취하면 기억은 4K 화질로 선명해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발걸음은 또 그 골목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헌책방, 우리가 같이 웃던 디저트 카페,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작은 술집. 풍경은 소름 돋을 정도로 그대로였다. 나만 빼고.
‘여긴 그대로인데… 나만 아니구나.’
길거리에 서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댄 지금 행복하겠지. 그댄 지금 행복하겠지.”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래야 내가 덜 비참해질 것 같아서.
휴대폰을 켜고, SNS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쳤다가 지웠다. ‘혹시’는 알림으로 오지 않았다. 기적은 늘 남의 화면에서만 울린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은 정직했다.
일 년이 지났다. 겨울을 견뎠고, 이젠 정말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카페, 따뜻한 아메리카노, 읽다 만 소설책. 완벽하게 평온한 하루였다.
그런데, 창밖으로 그녀가 지나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그날, 우연히 ‘봄’을 본 게 아니라, 우연히 ‘너’를 봤다.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내 마음의 파장이 다시 시작됐다. 일 년간 쌓아 올린 ‘괜찮음’이라는 성벽이 단 3초 만에 무너졌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고, 잔인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책은 첫 장에서 멈췄고, 커피는 식어갔다. 나는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내 인생의 페이지도 그녀라는 챕터에서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댄 날 봤을까.’ ‘날 보고도 모른 척 지나친 걸까.’
꾹꾹 눌러 담았던 그리움이 다시 차올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별은 지우는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해지는 과정일 뿐이라는 걸.
우연히 봄. 그게 형벌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반만 맞다. 시간은 망각이 아니라 적응을 선물한다.
나는 그녀 없는 세상에 적응할 것이고, 그녀도 나 없는 세상에서 분명 잘 살 것이다. 그게 더 나를 찌질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바란다. 언젠가 이 익숙한 거리에서, 우연히라도 그녀를 다시 보기를. 다가가 말을 걸 배짱은 없어도, 그저 멀리서라도 확인하고 싶다. 나만 이렇게 멈춰 서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나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에 서 있고, 입술만 달싹인다.
“난… 괜찮다오.”
그게 나의 찌질한 사랑이고, 나는 오늘도 횡단보도 앞에서 봄을 기다린다. 우연히라도.
난 괜찮다오. …사실은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