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가 무너진 신뢰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
7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천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곧장 남쪽 끝자락의 어느 지방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엔 다시 강원도의 산골 마을로 이동해야 하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왕복 수백 킬로미터의 운전, 쪽잠, 그리고 현장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기대어린 눈빛. 몸은 부서질 듯 힘들었지만, "강사님 덕분에 우리 마을이 살 것 같다"는 담당자의 말 한마디에 피로를 잊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이자, 프리랜서 강사의 숙명 같은 보람이었다.
하지만 그 뜨거웠던 여름의 땀방울이 차가운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의는 성황리에 끝났다. 현장의 반응도 좋았고, 주최 측인 대행사 대표도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약속된 정산일이 지났지만, 입금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대표님, 내부 사정으로 결재가 조금 늦어집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는 꼭 처리하겠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조금만 더..."
처음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자금 흐름이 막힐 때도 있으니까. 게다가 먼 길을 달려와 강의를 해준 나에게 설마 나쁜 마음을 먹었겠나 싶었다. 그렇게 11월이 지났고, 어느덧 해가 바뀌어가는 12월이 되었다.
5개월. 그 시간 동안 나는 '배려심 깊은 파트너'에서 '독촉하는 채권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정당한 일이, 왜 구차하게 사정을 봐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 되어야 하는가. 자존심이 상했고, 나중에는 내가 전문가로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모멸감마저 들었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의미했다. 나는 감정을 걷어내기로 했다. "힘드시죠, 이해합니다"라는 위로는 상대방에게 "돈을 안 줘도 되는 명분"을 줄 뿐이었다.
나는 마지막 통첩을 보냈다. 핵심은 간단했다. '나의 권리'와 '당신의 리스크'를 명확히 연결하는 것.
"대표님, 5개월을 기다렸습니다. 강의료가 기업 입장에서 해결 못 할 천문학적인 금액도 아닌데, 차일피일 미루는 것을 더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O월 O일 오후 3시까지입니다. 만약 입금이 안 된다면, 익일 오전에 [관할 지자체 관리 감독 기관] 및 [원청 마을 운영위원회]에 직접 연락하여 예산 집행 여부를 확인하고 민원을 제기하겠습니다."
이 메시지는 '협박'이 아니었다. 나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찾기 위한 최후의 '권리 행사 예고'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5개월 동안 "노력하겠다"며 핑계만 대던 대표가, 저 문자를 보내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는 다급했다. "제발 원청에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 "무조건 날짜를 맞추겠다"며 사정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관공서'와 '원청'의 신뢰가 깨지는 것이었다. 결국 약속한 데드라인에 맞춰 입금 알림이 울렸다.
그런데 입금자명이 낯설었다. 계약했던 회사가 아닌, 처음 들어보는 제3의 신생 법인 명의였다. 인터넷 지도를 켜보니 원래 회사와 불과 차로 2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1.1km. 그 짧은 거리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씁쓸함은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줄 돈은 있었거나,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나의 지급 순위가 저 밑바닥에 있었을 뿐.
이번 일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낀 점들을 동료 강사님들과 나누고 싶다.
1. '좋은 게 좋은 것'은 없다. 배려는 상대가 상식적일 때나 통한다. 약속이 두 번 이상 어겨지면, 그때는 사정이 아니라 '습관'이거나 '고의'다. 단호해져야 한다.
2. 아킬레스건을 파악하라.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대행사(에이전시)의 경우, 그들의 갑인 '관공서'나 '원청 기업'이 그 아킬레스건이다. "원청에 확인해 보겠다"는 말 한마디가 백 번의 독촉보다 강력하다.
3. 기록은 칼보다 강하다. 강의 현장 사진, 담당자와의 통화 녹음, 주고받은 메시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유튜브 등에 업로드된 강의 영상까지. 이 모든 것이 나중에 나를 지켜주는 법적 증거가 된다.
나는 오늘 5개월 묵은 체증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통장에 찍힌 숫자보다 더 값진 것은, 무례함에 맞서 내 권리를 지켜냈다는 작은 승리감일 것이다.
전국의 모든 프리랜서 강사님들, 당신의 땀방울은 절대 공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디, 단호하게 지켜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