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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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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이 May 24. 2023

기억나지 않는 냄새

글자를 매개로 하는 어떤 치유

내 동생에게


앞으로 3달 뒤면 네가 떠난 날이자, 나의 생일이야. 그리고 오늘은 너의 생일이야.

생일 축하해.

오늘 꿈에는 과연 네가 나와줄까 궁금하면서, 요새는 약 때문에 일반적인 꿈은커녕 악몽만 꿔서 네가 꿈에 나왔을 때 그렇게까진 반갑지 않을 것 같아. 부디 내년 너의 생일에 찾아와주렴.


너의 시간 감각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졌어. 내 꿈에 나오는 너는 21년 전 모습 그대로 일 때가 많아. 그런데 가끔은 네가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채로 나올 때가 있어. 나는 네가 나이 든 모습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참 이상해. 그러고 보니 지금의 너에게 어떤 감각을 묻는 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네.


지난주는 너무 우울했어. 남에게 미움을 산 것 같아서 불안해하면서 지냈어. 그리고 에너지가 차오르는 달이어서 그런지 이번 주 절반정도는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 굳이 내가 생을 이어갈 필요가 있을까, 가치가 없는 나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에게 피해를 줄 바에야, 환경에 안 좋은 영향을 줄 바에야 생을 마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지난주 상담을 마치고 난 후 폭식을 했어. 얼마나 죽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으면 또 폭식했을까. 

쇄골까지 음식이 차오를 정도로, 위가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날 정도로 폭식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설거지를 하고, 빨래도 했어. 정신의학과 약이라는 게 참 신기한 것 같아. 폭식은 막지 못해도 내 일상이 어떻게든 이어지도록 해주거든.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두 알 반. 내 손톱보다 훨씬 작은 다섯 알 반쪽짜리 알맹이들이 내 감정을 요동치지 않게 하고, 24시간을 어떻게든 별일 없이 보내게 만들어.


폭식을 마친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어. 창문을 열어놓고 김초엽 작가 소설집에 수록된 <숨그림자>를 읽었어. 너무나 좋은 글이었어. 작가가 꿈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숨그림자>에 쓰인 글을 하나하나, 쪼개어서 먹어서 내 몸에 새기고 싶을 정도로, 눈을 감으면서 다시 문장을 음미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어. 요즈음 읽은 책 중에서는 한숨을 토할 정도로 좋은 글이었어.


<숨그림자>의 절정을 지나 결말 부분이 올 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났어. 나는 방금 기름지고 냄새나는 음식을 먹었는데 방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책을 읽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내 주변에 아무 냄새가 나지 않은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보려고 코로 바람을 뒤져보고, 커튼을 통해, 내 몸을 통해 코로 올라오는 공기를 뒤져봐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어. 그러다가 너와 헤어진 날이 떠올랐어.


나는 냄새를 정말 잘 맡고 기억도 잘하는데 너를 떠낸 보낸 날의 냄새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새벽 6시에 집으로 걸려 온 엄마의 전화를 받을 때의 집 냄새, 혼자서 울면서 버스 맨 뒷자리에 탔을 때 버스 냄새, 네 장례식장 가는 길 나를 마중 나온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았을 때 할머니 냄새, 네 이름 앞에 계속 타고 있는 향의 냄새. 그 어떤 냄새도 기억나지 않아.

운구 버스 창문으로 본 아파트의 별과 달 페인팅과, 네가 뜨거울까 마음 졸이며 눈이 부르트도록 울었던 화장터나, 모두가 헤어질 때 먹었던 올갱이 해장국은 다 기억나는데, 놀랍게도 그 어떤 냄새도 떠오르지 않아.

냄새가 기억나지 않아.


엄마와 따로 산 지 벌써 4년이 가까워지는데, 아직도 오래된 내 옷에서는 엄마 냄새가 나. 그 정도로 냄새를 기억하는 나인데 어째서 너의 냄새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까?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그 순간, 티셔츠의 목을 치켜올려 냄새를 맡았는데 편안한 나의 냄새가 났어. 내 코는 정상인데 너를 떠올릴 때면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아.

과연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아마 하나도 없겠지. 아마도 이것이 내가 너를 기억하는 냄새겠지.


아마 내가 한 번도 너의 생일에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어서, 아니 내가 너의 일생에서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어서 너를 추억할 만한 순간과 기억이 없어서 아무 냄새가 안 나는 것 같아.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항상 궁금했고 묻고 싶었지만, 너는 말을 하지 못했고 나의 말도 이해하지 못했지. 아니, 사실 너의 상태에 대해서는 으레 내 마음대로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 너의 말을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어. 흔한 변명 중 하나지만, 나는 그때 어렸고 우리 집은 장애가 있는 너를 숨기기 급급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장애에 대한 이해가 있을 리 만무했지.


하지만 너는 현관에 앉아 바깥을 보는 걸 좋아했고, 집안 사람들이 외출하면 같이 나가고 싶어서 잠긴 방문을 열려고 하다가 보일러를 고온으로 높이곤 했어. 어느 날 안방 문 바깥에 잠금쇠가 달리게 된 건, 네가 다른 사람이 없는 새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었지.

만약 네가 말을 하지 못할 뿐이고, 나나 다른 사람이 하는 말들을 다 이해했다면― 너무 끔찍할 것 같아. 사람들은 원래 끔찍하거든. 바깥으로 나가려던 너를 안방에 계속 두려고 문 밖에 잠금쇠를 달았던 것처럼 말이야. 나는 모를 이유로 네가 계속 우는 데, 나는 너를 달래주기는커녕 혼자서 엄마를 만나러 갔던 어떤 날 처럼 말이야. 사람은 원래 끔찍하단다.


그래서 <숨그림자>가 나에게는 좀 더 와닿는 소설이었던 것 같아. <숨그림자>는 소통하는 방법이, 그러니까 언어를 교환하는 방법이 다른 원형인류와 지하인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야. 극지방 얼음 깊은 곳에 동명하고 있던 원형인류를 깨우면서 이야기가 진행돼. 원형인류의 뇌에는 지하인에게는 있는 '마이크로바이옴'이 없어 바로 소통할 수 없고, '마이크로바이옴'이 원형인류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원형인류는 투명한 격리실에 갇혀 지내게 돼. 나중에 지하인이 뛰어난 기술로 원형인류와의 언어 통역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통역 중 오류가 발생하지. 

그게 너와 나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어. 그게 너와 세상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어.


네게 준 것도 없기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투명하고도 두꺼운 유리 벽이 있었기에 나는 너의 냄새에 대해 아무 기억이 없는 것 같아. 네가 있었던 벽 안에서는 무슨 냄새가 났을까?



2023년 5월 24일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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