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매개로 하는 어떤 치유
내 동생에게
나는 지금 건네기 참 어려운 이야기 2개를 마음에 담고 있어.
둘 다 나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인데, 하나는 네게 전해야 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이야기야.
나는 가끔 남에게 이야기를 하기가 참 어려워. 평소에 말도 참 많고, 어떨 때는 남에게 상처 주는 이야기도 제법 할 정도로 남에게 이야기를 잘하거든? 그런데 상대방의 반응이 어떨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되거나, 그냥 별일 아닌데도 내 멋대로 굉장히 부정적인 피드백을 듣는 것이 상상되는 이야기는 남에게 하기가 참 어려워. 다들 그러겠지?
내가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질문하는 것을 주저할 때마다 상담선생님은 "그럼 네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떨 것 같아?"라고 질문을 하고, 나는 "별생각 없을 것 같은데요?"라고 답해. 내 대답을 들은 상담선생님은 "그럼 말해도 되지 않을까? 혼자서 고민과 걱정을 끌어안고 있을 바에야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말하지. 상담 선생님의 말에 즉시 끄덕이더라도, 한참 뒤에 이런 생각을 해.
'어차피 나는 남 일에 관심도 없어서 별일 없다고 생각해서 별생각 없을 거야. 다른 사람은 다를 거야.'
어떤 날은 내가 (상대는 모르지만) 힘들게 전한 말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정말 별거 아닌 말로 편안하게 해결될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힘들게 전한 말이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상대에게 큰 상처라던가, 무거운 짐이 되어 해결이 안 되고 계속 공회전만 될 때가 있어. 사실 후자가 무서워서 나는 말을 건네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사실 방금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전화했더니 '별거 있는 일'이어서 대화가 공회전이 되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말았어. 대화의 결과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 같아).
네게 편지를 쓰다 보니, 그리고 조금 전 통화를 끝내고 나니 그냥 나는 갈등상황에 부닥치는게 너무나 싫어서 혼자서 다양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짜고, 그 시나리오만이 오직 존재하는 세상에만 갇혀 살아버리는 것 같아. 대부분 내가 쓴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는 나은, 그러니까 최악의 시나리오와 (그 와중에 내가 생각해 둔) 최상의 시나리오 그 중간쯤의 대답을 받아. 그리고 어떤 때에는 최악의 시나리오 그대로 연출되는 경우가 있어.
그래서 가끔 보이는 '한 줄기 빛'은 너무 날카롭고, 외려 최악의 시나리오가 좀 더 따뜻하다고 느낄 지경이야.
그래서 최악의 시나리오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아버리는 걸까? 아님 살아져버리는걸까?
어느 날 정신의학과 의사가 우울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어린 시절에 관해 물었어. 나는 뭐 항상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내가 고등학교 때 네가 죽었고, 그다음 해에는 우리를 돌봐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 그랬더니 의사가 아마 우울의 시작이 '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했을 거'라고 이야기 했어.
너의 죽음으로부터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가 재설정 되었다고 했어. 그래서 너의 죽음으로부터 나의 우울이 촉발되고, 우울이 해결될 시기를 놓쳐 지금과 같은 만성우울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부정했어. 나의 좋지 않은 감정과 이런 더러운 우울 같은 게 어찌 감히 너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히.
그러고 나서 상담선생님과 이 이야기를 했어. 나는 '너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우울을 인정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상담선생님은 서로가 모르는, 그러니까 어쩌면 나조차도 모르는 우울의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고, 비단 동생의 죽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어.
어떻게 지금 나의 힘듦이 네가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너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 큰 상실이었어. 내가 세상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여겼던 네가 세상을 떠났기에 나에게는 이제 가족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지. 어른들의 무책임함, 나이가 어린 나의 무기력함.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너를 무연고자 유골함에 뿌릴 때 뜯어말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 이건 나의 나약함과 건네지 않은 많은 거친 말들의 문제고, 나의 어릴 적의 이야기일 뿐이야.
그런 나약한 어른들 탓에 나는 너를 애도해야 할 기간에 애도하지 못하고, 이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여전히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하지만 그런데도 내 인생의 기록적인 이 우울은 너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아직 내 안 우울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너로부터 시작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
예전에는 '우울의 원인'을 찾으면 어떻게든 우울함이 해소되곤 했어. 근데 작년부터 촉발된 우울은 원인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아. 1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 정신의학과 의사가 말했던 것처럼 그냥 에너지가 없어서 원래 있던 우울을 누르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심리 상담과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은 지도 이제 각각 10개월, 6개월이 다 되어가. 곧 1년이 되겠지?
과연 1년이 되었을 때는 내가 느끼는 이 우울함과 죽음을 향한 충동이 사그라들까? 궁금해. 아마 사그라들지 않겠지. 그것이 내가 원하는 안온함일지도 몰라. 그게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야.
나에게 남은 이야기들, 남에게 건네지 못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나의 우울에 대한 것들이야. 나의 우울함, 나의 충동, 죽음에 대한 생각들. 요즘은 계속 약을 먹어서 그런지 무엇이 우울한 것이고 무엇이 기쁜 것인지조차 조금 모호해져 가. 모든 감정이 여전히 ――――――――――― 이렇거든.
건네지 못한 이야기가 나에게는 이제 하나만 남았어. 참 신기하지?
너에게 건네버린 말속에 내가 반드시 건네야 할 말들과 그것을 건네받아야 할 사람들이 참 많은데, 나는 굳이 그들에게 네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왜냐면 그들은 어른으로서 여전히 나에게 너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지 않거든. 만약 그들이 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을 건네버릴 거야. 마음껏 상처받으라고. 당신들의 무책임함과 나약함에 대해서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은 무기력하지 않은 내가 공격할 거야. 너를 대신하는 건 아니고, 그저 나를 위해서.
그나저나 과연 나에게 하나 남은 이야기를, 사무실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전달할 타이밍을 놓친 이야기는 그냥 전달 안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버려. 하지만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또 나는 이 이야기를 언제 전달할지 다시 마음을 먹겠지. 근데 아까 했던 통화로 나에게 하나 남은 이야기를 건네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그냥, 언젠가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때 하는 것으로. 그러기로 마음먹었어.
그때가 되면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한 최악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내가 건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답을 모르겠지. 나조차도, 그리고 상대방조차도.
2023년 5월 29일
누나가
추신: 너의 생일은 때로는 부처님오신날이기도 하고, 네 생일 전후로 부처님오신날이 있어. 그럴 때마다 너의 장례식 때 내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 천주교 병원에서 죽었던 너의 입관 때 수녀님이 쥐여준 묵주와, 큰이모가 절에 걸었다던 너를 위한 연등과, 할머니의 교회 신자들이 했던 기도들. 너는 참 많은 종교의 배웅을 받고 떠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