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이었다. 매일 아침 죽음의 그림자를 만나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몸에 찾아온 만성적인 질병이나 심리적 고통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눈을 뜨면 온 집안이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와 책장의 책들, 아름답던 꽃들조차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덮쳐왔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허우적거리디 모든 것을 토해냈다.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붙들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으아악! 악! 으악!”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편이 혼비백산하여 달려왔다. 정신 차리라며 울먹이는 남편 등에 업혀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 침대 위에서도 어지럼증은 멈추지 않았다. 간호사와 환자들까지 빙글빙글. 허우적거리다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침대 다리를 붙잡은 채 남은 음식물들을 쏟아냈다. 간호사가 다가와 내 눈동자에 작은 손전등을 비추더니 수액을 가져와 팔에 바늘을 꽂았다.
“이 수액 다 들어가면 말씀해 주세요.”
남편은 공손하게 대답하며 내 곁을 지켰다. 수액이 다 비워지자 의사가 다가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보호자님, 검사 결과 병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수액을 맞으셨으니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세요.”
남편은 환자가 계속 토하고 어지러워하는데 그냥 가라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환자실 쪽으로 사라졌고, 뒤쫓으려는 남편을 간호사들이 막아 세웠다. 결국 남편은 복도로 밀려났다.
‘사람은 언젠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고 이별하는 거라지만…….’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
이렇게 빨리 죽음 앞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육신을 내려놓아야 했다. 죽음을 직면하고 나니 그동안 잘못 살아왔던 것들이 후회스러웠다. 제대로 사랑 한 번 못 해봤는데. 작별 연습도 없이 진짜 작별을 해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에 남편은 다시 119를 불렀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병원 앞에 도착한 대원들이 나를 들것에 실어 집 이불 위에 눕혀주고 떠났다.
이불 위에 누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겨질 어린아이들이 생각났다. 절실하게 기도했다.
‘주여, 나에게는 아직 책임을 져야 할 우당탕탕 삼 남매가 있습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습니다.’
숨을 죽이고 죽음을 똑바로 응시했다. 신기하게도 세상의 기대, 자존심, 망신이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래,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먼 훗날일 수도, 바로 지금일 수도 있다. 죽고 나면 세상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죽고 난 후, 삼 남매에게 남겨줄 무언가가 단 하나도 없었다. 남편에게도 그 무언가도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혹여나 남편이 재혼을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애들을 거두어 줄텐데....'
죽음보다 그 이후가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남겨줄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그 간절함이 나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다음 날 아침, 낯선 젊은 아주머니가 대문 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어지러움에 나갈 수 없었기에 개미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밖에 누가 왔다. 대문 좀 열어드려라.”
아주머니는 방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주머니, 어디 많이 아프신가 봐요? 다름이 아니라 학습지인데요, 아이들이 있으니 구독 좀 하시라고요. 저도 바로 옆 빌라에 살아요.”
“아, 네……. 그럼 제일 쉬운 것으로 한 부만 넣어주세요.”
아주머니는 아이가 셋이니 초·중·고급을 다 신청하면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비용문제가 떠올랐고, 겨우 한 부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는 오늘은 서비스로 드린다며 종호, 현정, 소연이 손에 학습지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아이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큰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아이들이 연필을 찾으며 서로 먼저 풀어보겠다고 티격태격하는 소란스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역설적으로 생의 활기를 느끼게 했다.
학습지를 받아본 지 두 달이 지났다. 시험지 아주머니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남편 직장 때문에 대전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말했다. 아픈 몸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부축해 앉혀주며 쾌유를 빌어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학습지 돌리면 한 달에 얼마나 벌 수 있습니까?”
“아, 네. 잘하면 32만 원, 아이들이 그만두면 25만 원 정도 벌 때도 있어요. 아이들 학교 간 뒤 잠깐 하는 일이라 소일거리로 괜찮아요.”
“저…… 그 일을 제가 한번 해보면 안 될까요?”
아주머니는 놀라며 말렸다. 이렇게 아픈 몸으로는 안 된다고, 회복부터 하시라고. 나는 아주머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남겨줄 게 아무것도 없네요. 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보려고요. 단돈 백만 원이라도 벌어 놓고 죽어야 삶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제발 회사에 연결 좀 해주세요.”
눈물 섞인 부탁에 아주머니는 회사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방문한 사장님은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거절했다.
“아주머니, 건강이 최고인데 그 몸으로 어떻게 일을 합니까. 죄송합니다.”
사장님이 대문을 열고 나갈 때,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사장님! 저 잘할 수 있어요! 저 죽지 않아요! 일하다 죽게 해달라고 말 좀 잘해주세요!”
통곡하며 매달리는 모습에 사장님은 마음이 움직였는지 월요일 아침 다시 찾아오셨다.
“아주머니, 이 일이 정말 쉽지 않아요. 우선 집 근처만 해보시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사장님의 명함을 받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학습지 아줌마가 되었다.
아픈 몸을 바닥에 질질 끌다시피 하며 가방을 멨다. 첫날은 어지럽고 토가 나와 걷지도 못하고 실패.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넘어지면서 다시 도전했다. 다섯 집 방문하는 것도 숨이 차고 버거웠지만, 전봇대에 기대어 심호흡을 해가며 스무 집 배달에 성공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에게 남겨줄 돈을 생각하며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짓누르던 어지럼증이 땀방울과 함께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한 달을 채웠다. 어지러움 때문에 직접 회사를 갈 수 없어 사장님께 통장 입금을 부탁했다. 잠시 후, 첫 봉급 282,300원이 찍힌 통장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내가 해냈어, 내가 한 달을 살아냈어!”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나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배달 구역을 확장하며 전국 배달 사원 중 1등을 차지했다. 이러한 뒷사정을 모르는 우당탕탕 삼 남매는 엄마 덕분에 각자 수준에 맞는 학습지를 마음껏 풀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죽음의 공포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일궈낸 정직한 땀방울이,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눈부신 삶의 한복판으로 이끌어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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