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비가 온 뒤에나 비가 오기 전 습도가 높은 날, 산길을 걸으면 풀내음이 더욱 진하게 난다.나는 그런 날 맡는 풀내음이 참 좋다.
그날은 비가 오기 직전의 습도 높은 날이었다.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한 아침이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늘 걷던 해반천이 아닌 집 근처 등산로로 발길을 향했다. 휴대폰 하나만 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코스여서 30분 정도만 걷고 오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천문대'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차를 타고 가야지만 갈 수 있는 천문대라고 생각했는데 집 뒤에 있는 등산로와 천문대가 연결되어 있다니! 궁금함에 이정표를 따라 계속 걸어 올라갔다.
잠시 후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고 마실 것도 가져오지 않아서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바람결에 풀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500m만 더 가면 천문대라는 이정표를 보고 그냥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보자 싶어 발걸음을 계속 움직였다. 다행히 비는 조금 떨어지다 그쳤다.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시렸지만 몸은 피가 도는 것처럼 후끈거렸다. 어느새 나는 천문대에 도착해 있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온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도착한 곳에서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잠시 의자가 있는 곳에서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떨어진 낙엽들이 서로 부딪혀 바스락 거리는 소리, 진한 풀내음, 멀리서 풍겨오는 듯한 천리향 냄새. 눈을 뜨니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서서히 개이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을 흔들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는 그 자체로 온전해 보였다. 바람이 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 버티면 되려 힘이 든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대로 잠시 몸을 맡겨도 괜찮다는 것을 자연을 통해 배워나간다.
상처 난 꽃잎이 가장 향기롭듯, 비 오는 날 상처 난 풀잎에 빗방울이 토도독하고 떨어져 자신의 존재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그날의 풀내음이 나는 참 좋다.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다. 상처라는 단어가 주는 아픔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향기로움이 있듯, 상처의 아픔만 보며 살아갈지, 그 이면의 향기로움을 보며 살아갈지는 나의 선택인 것이다. 우연히 오른 등산길에서 자연 속의 나를 만났다. 바람, 구름. 하늘, 태양, 나무, 흙, 이 모든 것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은 그런 나를 항상 보듬어 준다. 그 속에서 나는 상처를 치유하고 향기로운 아름다움으로 무장한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