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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y November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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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07. 2024

함정

11월 7일





갈대처럼 흔들리는 내 모습이  싫을 때가 있었다. 좀 단단하게 버티면 좋으련만 살랑이는 바람에 간지럽다고 나부끼고, 차가운 바람에 춥다고 숨죽였다.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넌 왜 그리 흔들리기만 하냐고 다그치고 몰아세웠다.  그저 소나무처럼 굳건히 버티고 서있고 싶었다.


'제발, 날 건드리지 말아 줘. 가만히 두면 나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너로 인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려 했다. 관계 속에서 힘들어할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변한 건 너 때문이야'라는 원망이 깔려 있었다. 나 자신을 누구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변화하기보다 안주하려 했다. 변화는 두렵고 불안하니까. 변화뒤에 따라오는 나의 성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신혼여행으로 필리핀 세부에 갔을 때였다. 신랑과 핑몰에서 사야 할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신랑은 헤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물어보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찾아보려고 여기저기를 헤매고는 한다. 이런 나에게 신랑이 답답한 듯 말했다.


"그냥 저기 직원한테 물어보자."


"아 잠시만, 조금만 더 찾아보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지금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답답하다. 물어볼 수 있으면 물어보면 될 텐데 왜 혼자 찾겠다고 헤맸을까. 그 당시에는 그저 신랑과 다르게 내향적 성격이라 물어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혹시나 실례가 될까 봐 혼자 찾을 때까지 찾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타인에게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는 타인에게 완벽해 보이고 싶어서 습관처럼 '아는 척'을 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내가 모른다는 것을 타인이 아는 것이 싫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아는 것과 친근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 자신조차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를 친근하게 여겼을 뿐,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친근한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면 '아는 척'의 함정에 쉽게 빠지고는 한다. 몰라도 아는 척, 지식이 많은 척, 경험이 많은 척...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이런 습관들이 나를 완벽주의라는 함정에 빠뜨려 버린 것이었다.









다시, 갈대 같은 내 모습이 싫었던 그 마음을 돌아보았다. 그 이면에는 갈대 같은 내 모습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에게 완벽한 사람이고 싶었던 나는 결국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인연들로부터 완벽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 이면에는 내가 완벽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관계 속에서 오는 고통이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나는 완벽하려 최선을 다했노라 외쳤다. 나의 최선을 몰라봐준 너의 잘못이라며 타인을 향해 잘못을 외쳤지만, 사실은 나를 몰라봐준 나의 잘못이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정의란 오늘의 정의가 무엇인지 그때그때 매번, 기꺼이 고민하는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것으로 인해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이를 통해 나는 나의 어떤 모습을 알아차리고 배워나가야 할지 생각해보려 한다.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 불어오는 고통 속에서 그때그때 매번 기꺼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나의 정의다.


두려움은 반응일 뿐이고, 나는 용기를 내어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인 삶 속에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인간은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나는 그저 매 순간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 내어 좋은 결정을 하려 고민하고 고뇌하고자 한다. 그런 고민과 고뇌를 통해 나만의 단단한 직관체계를 만들어 나가려 한다. 함정에 빠진 줄 모르는 게 문제이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빠져나오는 건 문제 될 것이 없다. 혹여 다시 또 함정에 빠지더라도 이제는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요즘 내가 가장 감사한 것은 나에 대해서 탐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글을 씀으로써 고뇌하고 고민하는 순간들이 모여 직관이 되고 그 속에서 나는 나도 몰랐던 진짜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모습이 나약하기도, 바보 같기도, 부끄럽기도 하지만 모두 하나하나 꺼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나에게 배움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연한 만남은 없는 것처럼 나와 만나는 인연들 속에서 나는 어떤 것을 배우고 깨우쳐 나가야 할지 알아차리는 연습 중이다. 이것이 함정에서 빠져나와 깨닫고 고민한 나의 오늘의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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