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어떠한 문제를 마주쳤을 때 그 문제점을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지금 당장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회피하거나, 아니면 그 문제 속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버티고 견디며 이겨내는 것이다.
나는 늘 전자를 택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사실문제가 문제라고도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지금 당장 고통스럽고 힘든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되어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마치 합병증처럼 내 삶의 곳곳에서 무섭게 나를 괴롭혀 온다. 외면하지 말고 덮어두지 말고 조금 힘들고 지치고 괴로워도 마주하고 버티다 보면 그 문제의 원인이 드러난다. 그렇게 원인을 찾으면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그렇게 찾아낸 문제점의 원인은 대개 나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 문제의 속살이 나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혹여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한다 해도 이 고통스러움이 지나갈 것임을 알아차리고 초연해지며, 버텨내는 힘도 강해진다.
딸아이가 3살 때쯤 색칠공부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정보육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침에 눈뜨면 곧바로 거실에 나가 색칠공부책을 펴고는 새우깡처럼 조그맣고 통통한 검지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으로 아슬아슬하게 색연필을 잡고 색칠을 해댔다. 자신은 그림의 선들을 튀어나가지 않고 색칠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의 근육들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선을 튀어나가지 않게 색칠하고 싶다고 나에게 짜증을 내기도 원망을 하기도 했다. 그럼 하지 마라고, 이렇게 짜증 내고 울고불고할 거면 그만하라는 소리가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하다 보면 될 거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될 거야. 지금은 아직 손가락 근육들이 약해서 그런 거야. 이렇게 매일 색칠하면서 손가락의 근육들이 단단해지면 원하는 대로 색칠할 수 있어."
같은 말을 수십수백 번은 반복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3살짜리 딸아이에게 이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말을 3살짜리가 이해할리 만무하다 생각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세상살이가 그러한 것을. 모든 문제는 시간이 지나야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지나가는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속 한편에서는 '조금 튀어나가도 괜찮은데 왜 저렇게 집착할까. 강박이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흘러 딸아이가 8살이 된 지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색을 쓰며 그림을 그려 나간다. 미술학원에 보낼 생각은 없었다. 집에서 하는 만들기나 미술활동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아이는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똑같이 그려내고 싶어 했다. 그럼 한번 경험하게 해줘보자 싶어 20호짜리 캔버스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완성하는 4회짜리 클래스를 듣게 해 주었다. 첫 시간은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캐릭터를 선생님의 도움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재밌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을 거치자 자신이 생각한 대로 그림이 나오는 것 같지 않고, 처음 쓰는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색칠하며 채워나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딸아이가 그 그림을 완성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두 시간 동안 큰 캔버스 속 그림의 색들을 채워나가는 게 버겁기도 하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 않자 약간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끝까지 완성은 해봐야 알 수 있다고 설득하고는 마지막 수업을 마쳤다. 추가로 보충수업을 하기도 했고, 선생님께서 오일파스텔과 반짝이, 큐빅스티커 등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게 도와주셨다. 그렇게 처음으로 20호짜리 캔버스 속 그림을 완성해 보게 된 것이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딸아이는 말했다.
"엄마, 만약에 내가 포기하고 이 그림 끝까지 안 그렸으면 엄청 후회할 뻔했어. 좀 힘들긴 했는데 끝까지 그리고 나니까 너무 뿌듯해."
그렇게 말해주는 딸아이가 너무 대견하고 기특해서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매일마다 가서 스케치를 배울 수 있는 미술학원을 알아보았다. 딸아이의 그림에 대한 흥미를 좀 더 구체화시켜주고 싶었다. 요즘은 매일 학교를 마치고 미술학원 가는 시간이 너무 즐겁다고 한다. 또 언젠가 좌절하고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만, 한번 이겨내 본 사람은 그 좌절과 실망을 포기로 끝내기보다 끈기로 끝까지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좋은 것만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기쁘기 위해서는 슬픔이 있어야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이 있어야 한다. 성취를 느끼기 위해서는 불안과 초조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면서 결국에는 하나로 융합된다.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나라는 사람이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재미와 흥미로 설레는 마음을 갖고 시작한 것을 쉽게 끝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커다란 캔버스에 색을 채워가며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 기대하고 설레어했던 시간들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속상하기도 했던 시간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해낸 끈기와 노력들 모두 이 그림에 담겨 있음을 알고 있다. 반짝이고 알록달록한 색깔들 속에 딸아이의 손길이 담겨 있음을. 그동안의 시간들이 모두 담겨 있음을. 딸아이가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잘 버텨내 주어서 감사하다. 이런 시간들이 모여 살아가면서 힘든 일들을 마주칠 때 이겨내고 버텨내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부모로서 그저 자식의 그런 모든 순간들을 지켜봐 주고 응원하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훗날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을 때, 이 글이 너에게 닿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일어서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