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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y November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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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13. 2024

내리사랑이었다.

11월 13일






내리사랑: 손아랫사람에 대한 손 윗사람의 사랑.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일컫는 단어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자식이 부모를 그만큼 랑하것은 좀처럼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 순우리말.







한때,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며 살아간 적이 있었다. 내리사랑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치사랑(손윗사람에 대한 손아랫사람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야.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어."

이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가 많이 아팠던 시절,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던 시절, 자신 한 몸 건사하기도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만큼 벅찬데 자식이 둘이나 딸린 과부. 옆에서 지켜본 엄마의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조차 없어서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의 언저리에만 가도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오래 아팠던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이 있었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죽으면 없어질 , 나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내가 없으면 세상에는 너랑 네 동생 둘 뿐이지 않니. 싸우지 말고 서로한테 잘해라."


이 말을 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내게 꽂힌 말은 엄마가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니....'


싫었다. 차라리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게 낫지, 엄마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만약에 죽으면 나는 엄마 뼈를 갈아서 다 마셔버릴 거야. 그렇게라도 엄마랑 평생 같이 있을 거야."


섬뜩한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만큼 엄마의 부재에 대한 나의 두려움과 불안은 컸다. 엄마의 30대는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이 심해져 매일같이 아스피린과 독한 약으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두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엉덩이를 끌며 거동하던 엄마의 두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내 마음속에서 거대한 웅덩이가 되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독한 약과 소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엄마의 모습은 마치 내일이라도 세상을 등지고 떠날 것처럼 힘겨워 보였다.


꿈을 꾸다 펑펑 울며 깨어난 적이 많았다. 진짜 일어난 일처럼 꿈속에서 엄마가 죽었다며 대성통곡을 하고는 했다. 나의 꿈속에서 엄마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기도 했고, 교통사고로 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기도 했다. 꿈속에서 없어진 엄마를 찾아 길거리를 계속 울며 달리기도 했다.


'엄마...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꿈에서 엄마가 죽었다고 울면서 말하는 나에게 엄마는 늘 꿈은 반대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엄마가 더 오래 살려고 그런 꿈을 꾸는 거라고. 더 건강해지고 있는 거라고 했다. 엄마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건강해질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 때문이었는지, 나의 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천천히 건강을 되찾아갔다.








나에게 딸아이가 태어났다. 한품에 안기도 너무 작고 소중해서 조심스러운 생명체가 내 품으로 들어왔다. 처음 아이를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혀두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을 자고 있는 게 맞는 건지, 혹시 숨은 잘 쉬고 있는 건지, 너무 오래 자는 건 아닌지... 아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아도 이 작은 생명체가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생후 6개월, 감기에 걸린 줄로만 알았는데 다니던 소아과에서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던 날,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나의 귀 고막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모세기관지염으로 입원을 하고 퇴원을 했다 다시 또 폐렴으로 입원을 하고. 만 3살이 되기 전까지 수차례 폐렴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해 있을 때 엄마는 허리디스크로 인해 핀을 박는 수술을 하고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도 할 수 없으면서 손녀를 보겠다고 아픈 허리를 이끌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온 엄마를 보며 괜스레 짜증을 냈다. 엄마도 아픈데 뭐 하러 왔냐고 군소리를 했지만 사실 엄마가 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조그마한 아이의 새파랗고 얇은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고 약을 먹고 토하고, 약을 먹고 설사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씻기기를 반복했다. 병실 침대에서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쪽잠을 자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내 마음의 여유도 사라져 갔다. 엄마가 아픈 허리를 이끌고라도 와줘서 참 감사했다.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나에게 힘이 되고는 했다. 나는 아픈 딸아이 입에 밥을 넣어 먹여주고, 엄마는 그런 딸아이를 챙기고 있는 자신의 딸 입에 밥을 넣어 주었다.


내리사랑이었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핏덩어리 아이를 내 품에 안는 순간, 그 아이가 내 품에서 자라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처음 '아빠, 엄마'라고 불러준 순간,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그 어여쁜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나에게 있는 힘껏 달려와 목을 꽉 끌어안으며 안기는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벅차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내리사랑이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슴 아파올 때가 있다. 나에게 큰 산이자 버팀목이었던 부모님이 다시 나의 손길이 필요한 작은 아이로 돌아가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해지고는 한다. 온 마음을 다하고 쥐어짜 내어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 싶지만 내가 받은 사랑을 이생에서는 다 갚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슬퍼진다. 내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은 오롯이 내 딸아이에게로 간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말한다.


"네가 소중하고 귀한 보석 같은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어서 남편과 오순도순 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한테는 제일 큰 행복이고 효도야."


내가 나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것,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것. 그것이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래도 부모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이 마음은 다음생이 있다면 그때 꼭 갚고 싶다.


'엄마, 다음생애는 내 딸로 와줘. 내가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으로 키워줄게... 사랑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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