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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y November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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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15. 2024

여백, 여운, 여지

11월 15일





여백(餘白): 종이 따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자리.


여운(餘韻):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있는 운치/ 떠난 사람이 남겨놓은 영향/ 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있는 음향


여지(餘地): 남은 땅/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








아무것도 없는 빈 페이지에 깜빡거리는 커서만 한참을 째려보았다. 무엇을 쓸까, 이것에 대해 써볼까, 저것에 대해 써볼까. 고민하며 걸어도 보고, 영감을 줄 만한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들어도 본다. 이 시간동안 붙잡고 늘어지며 머릿속 생각들을 요리조리 굴려 글로 써내는것이 요즘 나의 재미이다. 의 메모 노트를 꺼내어 훑어보다 여백, 여운, 여지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적어둔 것을 발견했다.


정신을 어지럽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공간에 여유가 생긴 것처럼, 마음속에 쌓여있던 응어리들을 글로 다 토해내고 나니  마음속에도 빈 공간이 생겼다.  마음속에도 여백이 생긴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써내면 써낼수록 내 마음에는 여백이 생겨서 또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다.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나로 하여금 계속 흐르게 만든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불안하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무 살 때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을 할 때에도 마음이 불안하거나 흔들릴 때마다 노트에 생각들을 끄적이고는 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내 머릿속은 무겁고 커다란 돌이 되어 끝없이 어두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불안이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면 제발 누군가 이 불안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알려주기를 바랐다. 누군가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랐다. 부디, 나를 이 끝없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참을 깊은 바닷속에서 버둥거렸다. 온몸에 있는 힘이 빠져나가고 몸이 커다란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더 이상 가라앉을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깊고 어둡기만 했던 바다가 끝없이 밝은 빛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거대한 고요함과 쓸쓸한 적막이 몰려왔다.


거대한 고요함과 쓸쓸한 적막 속에서 나의 영혼을 마주했다. 모든 불안의 시작과 끝을 아는 그 누군가,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그 누군가, 끝없는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그 누군가,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린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불안의 시작이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면, 나는 나에 대해 가장 무지 했다. 나를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이를 알고 싶어 했고, 다른 것을 담으려 .


글을 쓰고, 또 쓰고, 또 써내어도 자꾸만 여백이 생겨난다. 나는 그 여백이 생긴 자리가 좋다. 무엇이든 채울 수 있고, 채워진 공간들은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들로 가득 찰 테니까.


여백이 생겨난 자리에 채워진 글들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 뒤에 진하게 남는 여운처럼,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사처럼, 쓸쓸한 시처럼, 그렇게 나의 여백 속에 여운을 남겨본다. 그 여운이 다음을 위한 여지가 되어 다시 돌아오면 새로이 생겨난 여백의 공간에 다시 여운을 채우고 다시 여지를 남겨둔다. 그렇게 무한한 빛 속에서 만난 나의 영혼을 여백 속에 여운으로 남기고 여운 속에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영원을 붙잡고자 한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

<들꽃 속의 천국> - 윌리엄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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