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餘韻):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있는 운치/ 떠난 사람이 남겨놓은 영향/ 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있는 음향
여지(餘地): 남은 땅/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
아무것도 없는 빈 페이지에 깜빡거리는 커서만 한참을 째려보았다. 무엇을 쓸까, 이것에 대해 써볼까, 저것에 대해 써볼까. 고민하며 걸어도 보고, 영감을 줄 만한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들어도 본다. 이 시간동안 붙잡고 늘어지며 머릿속 생각들을 요리조리 굴려 글로 써내는것이 요즘 나의 재미이다.나의 메모 노트를 꺼내어 훑어보다 여백, 여운, 여지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적어둔 것을 발견했다.
정신을 어지럽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공간에 여유가 생긴 것처럼, 마음속에 쌓여있던 응어리들을 글로 다 토해내고 나니 내 마음속에도 빈 공간이 생겼다.내 마음속에도 여백이 생긴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써내면 써낼수록 내 마음에는 여백이 생겨서 또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다.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나로 하여금 계속 흐르게 만든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불안하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무 살 때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을 할 때에도 마음이 불안하거나 흔들릴 때마다 노트에 생각들을 끄적이고는 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내 머릿속은 무겁고 커다란 돌이 되어 끝없이 어두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불안이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면 제발 누군가 이 불안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알려주기를 바랐다. 누군가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랐다. 부디, 나를 이 끝없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참을 깊은 바닷속에서 버둥거렸다. 온몸에 있는 힘이 빠져나가고 몸이 커다란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더 이상 가라앉을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깊고 어둡기만 했던 바다가 끝없이 밝은 빛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거대한 고요함과 쓸쓸한 적막이 몰려왔다.
거대한 고요함과 쓸쓸한 적막 속에서 나의 영혼을 마주했다. 모든 불안의 시작과 끝을 아는 그 누군가,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그 누군가, 끝없는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그 누군가,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린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불안의 시작이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면, 나는 나에 대해 가장 무지 했다. 나를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이를 알고 싶어 했고, 다른 것을 담으려 했다.
글을 쓰고, 또 쓰고, 또 써내어도 자꾸만 여백이 생겨난다. 나는 그 여백이 생긴 자리가 좋다. 무엇이든 채울 수 있고, 채워진 공간들은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들로 가득 찰 테니까.
여백이 생겨난 자리에 채워진 글들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 뒤에 진하게 남는 여운처럼,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사처럼, 쓸쓸한 시처럼, 그렇게 나의 여백 속에 여운을 남겨본다. 그 여운이 다음을 위한 여지가 되어 다시 돌아오면 새로이 생겨난 여백의 공간에 다시 여운을 채우고 다시 여지를 남겨둔다. 그렇게 무한한 빛 속에서 만난 나의 영혼을 여백 속에 여운으로 남기고 여운 속에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영원을 붙잡고자 한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