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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Mar 17. 2024

결국 해낼 것이라는 걸 알기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다."


나는 화투나 카드게임을 잘하지 못한다. 명절에 가족들끼리 모이면 늘 화투나 카드로 게임을 하는데 나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일단 숫자가 들어가면 복잡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화투 속 그림들은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그림들을 보고 몇 점인지 계산을 하는 이모들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뿐이다. 투판이 벌어지면 자주 들려오는 소리가 바로 "첫 끗발이 개끗발이다"라는 말이다. 게임초반에 점수를 많이 따간 사람이 끝으로 가면서 돈을 잃게 되는 경우를 두고 생긴 속어인듯하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처럼 처음 돈을 따게 되면 들뜬 기분에 휩싸여 자신의 페이스나 신중함을 잃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든 처음 시작부터 잘 풀리는 것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는 성향이 있다. 초심자의 운을 믿지 않는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맛본 달콤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나의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작년 12월 딸아이의 취학통지서를 받고 나서부터 사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초등학생 가방'을 검색을 한 뒤부터 알고리즘은 나에게 수많은 초등학교 입학 전 준비사항에 관련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이것'만큼은 꼭 준비해 주세요.> <예비초등 루틴 만들기>등 세상의 모든 예비 초등학생을 둔 엄마들이 분주히 아이를 학교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매일 아침 수영 수업에서 만나게 되는 언니들은 대부분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엄마들이다. 취학 통지서를 받았다는 나의 말에 언니들이 하나같이 하는 공통된 말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네~ 돌아서면 학교 갔다 돌아올걸~ 네 시간 조금이라도 가지려면 지금부터 방과 후 수업 이랑 학원들 알아보고 미리 시간표 짜둬야 돼."라는 말들이었다. 이런 말들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나는 불안하면 오히려 그 사실들을 외면하려 한다. 그래서 일부러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아무것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일종의 반항심이랄까. 


'아 몰라.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 2월이 되었고 가입학식을 한 이후부터 카톡으로 '제이티 아이알리미'에서 각종 소식들이 나에게 전해져 왔다. 돌봄 신청 알림, 방과 후 학교 운영 안내장등의 소식이 들어오자 정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방과 후 과목들과 시간들을 확인했다. 영어, 수학, 요리수업, 바이올린, 한자등 다양한 방과 후 수업들이 있었다. 딸아이에게 혹시 듣고 싶은 방과 후 수업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나 방과 후 수업 듣고 싶은 거 없는데. 그냥 다니던 피아노학원만 갈 거야."


"그래? 알겠어 그럼."


아이의 망설임 없는 대답을 듣고 나니 그동안 이유 없이 불안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학교를 다닐 당사자는 딸아이인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만 듣고 스트레스받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입학식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쯤 학교로부터 알림장이 도착했다. <늘봄학교 초1 맞춤형 희망 프로그램 수요조사>라는 제목의 설문이었다. 내용을 보니 돌봄을 신청하지 않은 아이들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으며 무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정규수업 후 이른 하교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올해부터 시범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으로, 돌봄을 신청할 수 있는 조건은 맞벌이 부모이거나, 다문화가정, 다자녀가정이어야 하는데 늘봄은 돌봄을 신청하지 않은 학생 누구나 다 신청가능한 것이었다. 아직 시범운영단계라 각 반에 20명씩 두 반만 운영한다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신청해 았다. 입학식날 발표난 늘봄 교실 명단에 딸아이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창의공예놀이, 그림책놀이, 종이놀이, 보드게임, 놀이체육등으로 요일별 다양한 수업 들을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월, 금요일은 1시 하교, 화수목은 1시 40분 하교지만 늘봄수업 두 시간을 듣고 오면 유치원 다닐 때와 비슷한 시간에 교하는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딸아이도 수업내용을 듣더니 신난다며 좋아했다. 등교시키고 돌아서면 아이가 하교하고 돌아와서 내 시간이 없어질 거라는 걱정도 사라졌다.


'오 예스~!'


입학하고 적응기간인 첫 주를 지내면서 딸아이는 학교가 너무나 재밌다며 신나 했다. 선생님도 너무 친절하시고 아는 친구들도 두 명이나 있고, 새로 사귄 친구들도 생겼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도 그렇게 빠르지 않은 3시에서 4시 사이라 유치원 다닐 때의 시간 패턴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도 아이를 등교시키고 수영하고 집에 돌아와 내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했다.


그런데 '시작이 좋은데?'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첫 끗발이 개끗발... 아니 아니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며칠뒤 딸아이가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늘봄을 다니기 싫다며 자기는 수업 마치고 바로 하교하고 싶다고 했다.


역시.


시작이 좋아 신이 났던 나는 그만 달콤함에 치우쳐버렸다. 어쨌든 딸아이가 늘봄을 하기 싫은 이유는 체육을 할 때 멀리뛰기를 했는데 자신이 멀리뛰기를 못하자 다른 친구들이 웃는 게 싫었다고 한다. 운동신경은 없지만 승부욕이 많은 딸아이는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체육수업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신랑은 멀리뛰기 잘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었고, 나는 잘하지 못한다고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8살 아이에게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잘하지 못한다고 안 하면 영원히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잘못해도 틀려도 계속하다 보면 잘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그냥 시도해 보는 거야... 한 달만 더 다녀보고 그때도 하기 싫으면 그만두자."


딸아이는 그날부터 한 달이 되는 날이 몇 밤 남았는지 나에게 매일 물어보고 있는 중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나에겐 마치 첫 단추를 꿰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마지막 단추까지 잘 꿰어질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사실 이 단추를 꿰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딸아이 본인이었다. 나는 이 단추를 대신 꿰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저런 주변에서 하는 소리들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알고리즘이 띄워주는 영상들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뒤 쳐질 것 같은 불안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 못 꿰어도 풀었다 다시 꿰면 될 일인 것을. 나의 역할은 아이가 스스로 첫 단추를 찾아서 꿸 수 있게 지켜봐 주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아이 대신 선택하고 행동하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의 마음으로는 엄마가 어느 정도는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다.


아이의 입학식날 교장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아이들을 믿어주세요. 불안함은 다른 아이와 비교하며 생기는 부모님들의 마음입니다. 아이들이 실수하고 틀릴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아이들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학교와 선생님들을 믿어주세요."


마음의 격한 공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 존재자체로 자연을 통해 배우고, 학교를 다니며 마주하는 여러 관계와 상황 속에서 지혜를 배울 것임을. 이런 문제들과 부딪히며 결국 해낼 것임을 알기에 아이를 믿고 지켜봐 주기를, 지켜볼 나를 믿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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