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업하러 오는 길에 어떤 남학생이 같이 학교 수영장에 수영하러 가자고 하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너무 당황해하니까 그럼 전화번호라도 달라길래 손에 끼고 있는 커플링을 보여주니까 그냥 가더라고. "
유키는 함께 언어중심 수업을 듣는 동갑내기 일본인 여자였다. 어느 날 아침 교실에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자신이 대만 남학생한테 대시받은 이야기를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저 어제 수업시간에 배운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중국어로 건넸을 뿐이었다.
“早安。”
(짜오안. 좋은 아침이야.)
대만의 언어중심은 우리나라 어학당 같은 곳이었다. 그 당시 나는 유학원같은 기관을 통하지 않고 혼자 인터넷을 통해 대만 유학을 준비했다. 대만의 대학교 입학시기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9월에 시작했다. 일단 가서 언어중심 과정을 밟으며 대학교 입학 신청을 할 계획이었다. 언어중심은 3개월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6월에 출국 일정을 잡아두고 가장 빨리 신청가능한 학교의 언어중심을 신청했다.
내가 신청한 언어중심이 있는대학교는 대만에서 정치외교학으로 유명한 정치대학교였다. 학교가 위치한 곳은 '무자(木柵)'라는 동네였는데, 타이베이시에서도 외곽에 위치하는 곳이었다. 정치대학교는 산 전체가 캠퍼스인 학교였다. 그중에서도 언어중심건물은 산정상에 가까운 곳이라 정문에서 교내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첫 수업의 긴장감을 안고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내가 있는 국제기숙사에서 정치대학교까지 갈아타야 하는 버스의 수는 3개였으며 예상 소요시간은 1시간 반정도였다. 다행히 국제 기숙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통학차량이 있어서 시간만 잘 맞추어 나가면 학교 언어중심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수업시작 시간보다 30분 정도 빨리 도착한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내가 배정받은 교실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교실이었고 커다란 타원형의 테이블 하나를 두고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한교실에 10명남짓의 학생들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다.
한국에서 2년간 중국어를 배우고 갔지만 내가 배웠던 것은 간체자였기에 번체자를 사용하는 대만에서 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했다.언어중심 선생님들의 번체자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다.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중국문자이며, 문자 자체의 아름다움을 아직도 이어나가고 있는 언어라고 설명했다. 사실 중국어가 간체화 된 이유는 높은 문맹률을 개선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간체화된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 문제라던지 사용할 수 있는 글자의 제한적인 문제들로 인해 일각에서는 다시 번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고유의 중국어 문자를 사랑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번체자로 중국어를 공부해 두면 간체자는 쉽게 읽고 쓸 수 있다. 원래의 글자였기 때문에 번체자를 익힌 사람들은 간체를 보면 어떤 한자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는 영미권 학생들, 대만과 수교를 맺고 있는 중남미권 교환학생들, 그리고 일본인 유키가 있었다. 유키는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마른 몸매에 진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이미지였다. 기초반이었기에 우리 모두 중국어로 대화하기보다 영어를 더 많이 썼다. 유키는 영어도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때 미국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26살이었던 나와 동갑이었던 유키는 결혼을 약속한 대만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남자친구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언어중심을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kinky(특이한, 변태적인)하다고 자주 형용했다. 아무런 앞뒤 상황들도 없이 자신을 kinky 하다고 표현하는 이 일본여자아이를 나는 그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멀뚱히 쳐다보는 반응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본에 있을 때 아르바이트로 모델활동을 했다는 유키는자신이 찍은 하이틴 잡지 같은 화보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고이 데스네~" 마치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사랑짱을 대하듯,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일본어를 쓰며 유키의 현란한 과거사에 호응해 주었다.
이토록 귀여운 유키는 승부욕도 엄청났다. 아무래도 한국, 일본학생들은 한자를 쓰는데 익숙하기에 받아쓰기 시험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팅시에(聽寫, 듣고 쓰는) 시험이 있는 날이면 교실에서 우리들만의 한일전이 펼쳐지고는 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내가 몇 점인지 확인한다던가, 자신의 시험지와 내 시험지를 비교하면서 맞춰본다던가 하는 귀여움을 넘어선 무례함이 내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1점 차이로 장학금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아무래도 서로가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친선축구경기나 야구경기등 한일전이 있는 날이면 교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유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고는 했다. 한국의 삼성은 애플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둥, 한국인들은 김치를 많이 먹어서 피부가 좋은 것이냐는 둥 교묘하게 나의 신경을 긁어댔다.
맞받아 치기엔 유치하고, 화내기에도 애매한,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은 유키와의 동행은 언어중심다니는 1년 내내같은 반이 되면서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