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고독: 두뇌가 겪는 외로움과 소외감

생활의 다른 면에서는 내가 훨씬 서투른 경우가 많았다.

by Youhan Kim

나는 어릴 적부터 책에 파묻혀 사는 것을 좋아했다. 동화책이나 만화 대신 과학책과 사전, 퍼즐집 같은 것을 탐독하는 아이였는데,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별다른 이유 없이도 “왜 하늘은 파랗지?” 같은 질문들을 곱씹는 시간이 즐거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관심사는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줬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 끝없이 자료를 찾고 정보를 찾아내는 데 몰두하곤 한다.


문제는 그렇게 습득한 지식이나 관점이 꼭 환영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일상의 사소한 고민을 꺼냈을 때, 나는 머릿속에서 이미 여러 갈래의 해결책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배운 것을 쏟아내면, 내겐 그저 “조금 더 구체적인 의견을 준다”는 느낌일 뿐이지만, 상대방에겐 “어려운 말은 빼고 쉽게 얘기해줘”라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나?’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낮추기도 하고, 아예 대화를 축소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작은 모임에서조차 타인들과의 대화 주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 나누는 잔잔한 수다에는 내 이야기나 지적 호기심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고, 그럴 때마다 “여기서는 굳이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낫겠다”며 입을 닫았다. 한두 번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주변과 따로 노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왜 너는 별로 말이 없어?”라고 물어오면, 대답하기도 애매해진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먼저 ‘그들보다 훨씬 멀리 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 격차를 크게 느끼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생활의 다른 면에서는 내가 훨씬 서투른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내가 심각해 보이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길게 말하는 것을 ‘잘난 척’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이 과정을 거치며 느낀 건, “높은 인지능력”이 마냥 뿌듯한 재능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생겨나는 간극이야말로, ‘지성의 고독’을 내 안에 오래 자리 잡게 만들었다.


한창 그 고독이 깊어졌을 때는, 누군가와 식사 자리를 갖는 일조차 부담스러웠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다가도, 다양한 변수와 정보를 한꺼번에 머릿속에 펼쳐 놓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습관이 발동하면, “이 메뉴 재료가 어디서 생산되었고, 영양소 구성은 어떻게 되고, 조리 방식에 따라 맛과 칼로리가 달라지겠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겐 그게 자연스럽지만,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뭘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냐”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자꾸 듣다 보면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이런 소외감은 서서히 감정적인 부담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그저 “대화 코드가 안 맞을 수도 있지”라고 넘겼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왜 이다지도 다른 걸까?”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왜 내 생각과 호기심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감되지 못할까?’라는 고민은, 점차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내가 너무 예민하고 복잡하게 굴어서 그렇다”며 자책했고, 또 다른 때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이 없는 거야?”라며 타인을 원망하기도 했다. 양쪽을 오가다 보면, 결국엔 “사람도, 나도 다 피곤하다”는 식으로 마음이 식어갔다.


심리학 자료를 찾아보니, 높은 인지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소외감에 시달리는 일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심사나 대화 주제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너무 깊거나 폭넓게’ 뻗어나가는 경우가 많아, 주변과 겉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또한, 남들에게 일상적인 문제라도, 고지능자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측면이 동시에 고려되기 때문에, 그 복잡함을 상대방이 “이해가 안 된다”라고 여겨버리면 대화가 순식간에 단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택한 방법 중 하나는, ‘대화의 목적’을 먼저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정말로 조언을 구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단지 감정을 나누고 싶을 뿐인지를 미리 파악하는 거다. 예전에는 상대방이 문제를 말하면, 즉시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때?”라고 해결책부터 내놓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답’보다 ‘공감’을 더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마음 나도 이해해”라는 식의 공감을 먼저 건네고, 혹시 상대가 구체적인 의견을 요청하면 그때야 내 아이디어를 조금씩 꺼내는 식으로 대화를 조절했다.




물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랑은 영 안 맞는가 보다” 싶은 사람도 여전히 있다. 모든 사람과 통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내겐 하나의 배움이었다. 예전엔 ‘고독’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언가 처연하고 낭만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무거운 감정이라는 걸 알았다. 특히, 누군가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나 혼자만 따로 떨어져 있다고 느껴지는 ‘관계적 고독’은 상당히 쓰라린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어떻게 하면 그 벽을 낮출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놓지 않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소외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배우는 즐거움 자체는 앞으로도 계속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가치이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호기심과 상상들을 전부 숨기고 산다면, 아마 그 또한 내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남는 숙제는, “내 지성을 어떤 방식으로 타인과 나눌 것인가”라는 문제다. 공감과 소통의 기술을 조금씩 익히면서, 지나치게 ‘부딪치는’ 방식을 피하되, 내 본연의 열정과 호기심은 잃지 않는 게 목표다.


이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지성의 빛이 혼자를 고립시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빛은 때때로 ‘벽’이 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창문’도 될 수 있다.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이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을 보여줄 수도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삶의 방식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열고 닫을 것인가’, 그리고 ‘언제 열고 닫을 것인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모임에 가면, “이번엔 얼마만큼 내 생각을 나누고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할까?”를 고민한다. 그래도 옛날처럼 불안해하며 숨어들기보다는, 조금씩 시도해보는 편이 낫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색을 가진 존재이고,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나의 색깔을 감출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 ‘지성의 고독’은 높은 인지능력으로 인해 생긴 것만은 아니다. 그 지성을 어떻게 활용하고, 얼마나 유연하게 관계 속에 녹여내느냐에 따라, 고독이 될 수도, 더 넓은 연결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내 호기심과 사고력이 빚어낸 이 고독을, 앞으로는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나가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나와 함께 그 길을 찾아보는 여정을 이어갈 수 있길 바란다. 이미 완벽한 해답은 없겠지만, 적어도 우린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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