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처음탄 할머니
장흥에서 광주까지 오랜 차멀미로 녹초가 된 꼬부랑 우리 할머니. 허리를 펴 주인집 아주머니와 마주치자, 아주머니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집주인아주머니는 말이 별로 없고 기분이 좋으면 인사를 잘 받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무뚝뚝하게 대답만 한다. 그런 나는 집주인아주머니를 어려워했다.
독립의 꿈을 안고 도시로 유학 간 나는 말이 도시지 논밭이보이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도 보고 싶고 동네 친구도 보고 싶다. 밥을 대충 먹고 다니며 용돈이 떨어질 때까지 학교 매점에서 빵과 우유로 난, 점심을 해결했다.
여름 방학을 맞은 나는 할머니께 광주 자취방에 가자고 졸랐다. 할머니는 좋아하셨다가 차멀미가 심해서 못 간다고 했다. 그랬다. 할머니가 차타는 걸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의 끈질긴 설득과 보챔에 여름 방학이 끝나는 날, 할머니를 광주 자취방으로 같이 가기로 했다. 위생 봉투와 손수건, 휴지를 챙겼다. 동네 버스 정류장부터 세 번의 버스를 타고 가는 먼 길. 평생 버스 한번 타지 않았기에, 할머니 손을 잡은 나는 오늘 버스에 오르는 계단이 무척 높아보였다. 평소엔 생각없이 훌쩍 올라가는 계단인데 할머니와 함께오르려니 계단이 무척 높아 보였다.
버스는 비포장 길을 동네마다 서며 읍내 터미널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벌써 목소리가 쉬어 내게 앞장서라며 손등으로 밀었다. 나는 광주 가는 표를 끊고 할머니와 버스에 올랐다.
차에 오르는 나와 할머니를 본 승차 담당 여직원은, 학생이 할머니를 모시고 간다며 대견하다고 칭찬을 했다. 나는 갈 길이 멀기에 그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늘만큼은 칭찬이 필요 없었다. 오로지 할머니가 탈 없이 광주에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운전석 뒤에 앉은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나도 차멀미가 있지만 할머니의 표정을 보는 나는 할머니가 힘들어 하면서,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머니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칼 찬 순사를 보았으며, 6.25의 총을 든 북한군 병사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그냥 앉아만 있어도 되는 이 버스 안에서, 그 어떤 시련보다 힘겨워 하신다. 그래도 이웃 할머니와 얘기하시던 시집살이 만큼 힘든 건 아니었으리라고 믿고싶다.
2시간의 뱃속을 흔드는 여정이 멈추고 광주 대인동 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은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버스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허리가 반으로 굽은 우리 할머니. 다른 할머니들은 허리가 반듯하고 길도 잘 걷는데, 왜 우리 할머니는 잘 걷지도 못하고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걸까. 차멀미에 지친 할머니는 오늘 따라 허리가 더 굽어 보였다.
나는 더디게 걷는 할머니가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속이 상했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것 같아 창피했다. 내심으로 다 와 간다는 생각에 주변의 시선은 모조리 무시하고, 느린 걸음으로 앞장선 나는 자꾸 되돌아보며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가 넘어 내가 자취하는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며 나는 “다녀왔습니다” 하고 안채를 향해 인사했다. 마당에 있던 집주인아주머니는 “응”하고 대답을 짧게 했다.
뒤이어 할머니를 본 집주인아주머니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주인아저씨가 달려와 아주머니를 다급히 진정시키는 말이 들렸다. 뭔가 알 수 없는 묘함을 느꼈지만, 사실 할머니가 오신다고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서 놀랐는지 모른다.
할머니가 오시자 달라졌다. 반찬과 밥을 할머니가 해주셔서 편했다. 그리고 뻔질나게 불러내던 선배들도 뜸해서 더 좋았다.
할머니는 김치 담그는 솜씨가 좋아 주인집도 김치담는것도 거들어 주고, 옆집의 할머니가 사는 집도 김치를 담가 줬다고 했다. 할머니는 친구가 생기고 집주인 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와 1년을 살고 이듬해 여름 시골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가는 날, 대문을 나설 때는 아저씨보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더 서운해했다. 잘 가시라고, 잘 가세요, 여러 번 손을 잡고 말했다. 친해진 옆집의 할머니도 잘 가라는 아쉬움의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는 만지지 못할 이별로 차멀미를 잊은 채, 마지막 여행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는 시외버스를 볼 때면 멀미를 심하게 하셨던 할머니. 날 키워주신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