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시린 새벽,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즐기는 나는 새벽녘 일이 끝나면 가끔 막걸리 두 병으로 지난밤의 고단함을 달랬다. 여러 종의 막걸리를 마셔본 나와 동료들은 요즘 월매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중이다.
1월 중순 어느 날 유난히 추워 밖에 나가기도 싫은 어느 새벽에 주섬주섬 걸친 운동복과 맨발의 슬리퍼를 신고, A 업소의 창문 없는 방에서 나와 건너편 C 편의점으로 향했다. C 편의점은 월매 막걸리를 팔기 때문이다.
환하게 켜진 편의점에는 항상 있던 자리에 원하지 않는 지평 막걸리가 있었다. 월매 막걸리를 기대하고, 손을 내밀려다만 손이 아쉬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원래 편의점 냉장고 하단에는 서울 막걸리 5병이 세로줄로 서 있고 바로 옆 칸에 세로로 월매 막걸리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전에 없었던 지평 막걸리로 바뀌어 있었다.
많이 마셔본 평범한 서울 막걸리를 살 순 없고 그냥 지평 막걸리 두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 내밀었다. 보통 때와 달리 오늘 계산대엔 가게 주인아저씨가 없다.
주인 아저씨의 부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는 왠지 짜증스럽고 무거운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월매 막걸리가 없네요?” 나의 말은 투박했지만 차분했고 조금은 정중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놀랍게도 아주 싸늘하고 빠른 목소리로 아주머니는 화내듯 크게 말했다.
“떨어졌어요.”
난 흠칫 놀라 바라보자
“떨어졌다니까” 하고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지평 막걸리 자리에 월매 막걸리가 있었는데”라고 나는 말을 꺼내자.
그 아주머니는 또
“떨어졌다니까” 하고 또, 반말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친절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말투가 싸우자는 것 같았다.
사실, 빈 곳이 없는 막걸리 칸은 떨어진 것이 아니고 지평 막걸리로 바꿔 놓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기분이 상했고 내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아서 더 기분이 나빴다.
솔직히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말했다면 서울이나 지평이나 아무거나 마셔도 나는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이 상황이 벌어지자 춥게 나간 새벽부터 내 기분의 수은주가 뜨겁게 확 올라갔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제가 여기서 월매 막걸리를 자주 사는데 월매 막걸리 자리에 지평 막걸리가 있어서 물어보는 겁니다.”라고 애써 진정하며 차분히 말했다.
“떨어졌다니까”
왜 귀찮게 자꾸 묻냐는 식으로 아주머니는 또 화내며 쫓아낼 듯 소리쳤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이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눈을 보았다. 뚫어져라 보았다.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를 깔보며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편의점 사장의 입장에서 본 허름한 손님, 손님이 보는 매너 없는 손님에 대한 예절.
화가 난, 나는 주절주절 대꾸할 필요가 없다. 애써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다.
미운 감정이 증기 기관차처럼 뜨겁게 달려왔다. 나는 생각의 힘으로 무기를 들었다. 당신은 이 순간만큼은 아주 나쁜 여자라는 정확한 타깃을 세우고 곧바로 경멸의 미운 오리 핵미사일을 인정사정없이 아주머니 눈속으로 발사해 버렸다.
3초 안에 벌어진 나의 무식한 감정들이 날카롭게 폭발했다.
3초면 넉넉하고 충분했다.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때 원없이 사용했던 핵미사일은 아주머니를 크게 혼내 줄 것이다.
짧지만 강력한 전투를 벌이고 난 후 동시에 눈빛을 거둬들였다.
나는 한숨을 감추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냥 이렇게 주세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난 말했다.
그 아주머니는 곧바로 말했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봉지 드릴까요?”
“네” 하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확실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래도 난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지평 막걸리 봉지를 들고 문밖을 나가려는데,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확실히 달라지고 조금은 부드러웠다.
나를 그런저런 막걸리나 사 마시고 하루를 보내는 사람 취급을 한 것 같아 난 기분이 상했고 그 아주머니도 내가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월매 막걸리가 아닌 지평 막걸리를 사 들고 걸어오면서 차츰 무언가 그 아주머니에게 미안함이 드는 건 알 수 없었다. 아주머니의 톤 다운된 목소리에 화가 났던 내 감정이 점점 가라앉고 미운 오리 핵미사일을 쏜 것이 미안해졌다.
아마, 아주머니도 어떤 사정이 있겠지. 코로나로 인해 손님이 줄고 매출이 감소하는 건 내가 일하는 업소나 여기 편의점이나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시하고 사 올걸. 그랬나 하고 차가운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대충 걸치고 나온 내 모습과 슬리퍼를 신은 엄지발가락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