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맞아 1박 2일로 필라델피아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과학박물관도 가고,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역사적인 장소도 가고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가 원하는 한국식 바비큐까지 야무지게 사 먹고 돌아왔다.
아이는 돌아오자마자 밀린 숙제를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이가 스스로 공부하는 광경이라니 엄마들이 바라는 ‘완벽한’ 광경이다.
그런데, 완벽한 광경에 금이 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잠자리에 들면서 아이는 읽고 싶은 한국 책을 주문해달라고 했다. 보통 때라면 책을 사달라고 하니 완벽한 광경에 완벽함을 더 얹는 일인데, 근래 아이의 독서태도에 불만을 갖던 차 안된다고 했다(해외배송을 하면 책값이 1.5배 이상 들어 책값만큼 기대가치가 더커진다). 아이는 불만을 표시하면서 삐치기 시작했고 나는 독서태도를 조목조목 짚기 시작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우리의 행복한 여행은 덜 행복한 결말로 끝나버렸다.
내가 언성을 높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이의 독서 태도 때문인가. 아쉬움 없이 한국 책을 당당하게 사달라고 해서 인가. 아닌거 같다.
여행 일정도 마지막 저녁식사까지도 아이가 원하는 걸 고려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고작 책 한 권, 그것도 자신의 독서태도가 잘못되어서 조금 수정하면 바로 사주겠다는데 삐치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 그것이 언성을 높이게 된 솔직한 이유이다. 너를 위해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고작 책 한 권 안 사준다고 한다고 삐치냐는 배신감, 억울함 때문이다.
나는 엄마에게 깊은 서운함이 있다.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도 어렵고 부담스럽지만 과거 일을 이제야 돌이켜 들추어내는 것도 힘겹고 그녀에게 죄책감이 든다. 그녀는 나의 우주였으니까.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학창 시절에는 공부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동생도 잘 챙기고, 한번 잔소리하면 단번에 고쳤다(남편은 사람이 단번에 고쳐진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그녀가 인정했다). 나의 레이더는 항상 그녀를 향해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녀의 행복은 내 담당이라도 된 거처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거처럼 노력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엄마와 나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고, 남편과의 사이도 편안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상담을 받았고 본 가족과의 문제가 부부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즈음 엄마도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서 복합적인 이유로 가족 상담을 했다. 여러 에피소드를 나누고 감정 교류를 시도했다.
“비가 갑자기 와서 하교 길에 다른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데리러 오는데, 나는 혼자 비를 맞고 서운한 마음에 엄마를 찾아가면 늘 못돼 처먹었다고 혼이 나서 참 슬펐어요.”
“나는 그때 돈 벌고 너희들 키우느라 최선을 다했어. 얼마나 바빴으면 너 어렸을 때 젖 못 먹어서 고개가 팍 꺾이면 네 할머니가 젖 좀 먹이라고 널 데려왔었잖니.” 묻지 않아도 바빴음을 친절하게 부연설명까지 하면서 정당화했다.
그렇다. 그녀는 그렇게 일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최선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녀가 ‘최선’을 다한 목적이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말이다. 누구를 위한 최선이었을까. 열심히 일해서 자식을 잘 키우는 게 온전히 나만을 위한 최선인가. 어쩌면 본인을 위한 최선이 더 크지는 않았던가 감히 생각해 본다.
“다른 아이들은 다 데리러 오는데, 넌 엄마가 안 가서 서운했겠다. 바빠서 못 갔는데 미안하다.”의 말이 듣고 싶었던 나는 엄마의 최선도 이해 못 하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붙잡고 사는 옹졸한 어른이 되었고, 화해를 시도해 본 용기는 답답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잘못한 일이나 실수한 일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그때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뒤늦게 맺힌 내 마음을 풀고 화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거 같다.
내가, 오늘 하루 다한 '최선'은 누구를 위한 최선이었을까. 정말 아이를 위한 최선이었을까. 내 만족을 위한 최선은 아니었을까. 가끔은 '차선'이 나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꽉 찬 최선은 빈틈이 없어서 다른 것을 용납하기가 힘들다. 아이에게 차분하게 설명할 여유도 허락하기 어렵고 공감을 토대로 한 사과를 할 수 있는 여지조차도 비집고 들어가기가 버겁다. 왜냐하면 이미 최선을 다하느라 많은 것을 소진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정당한 변명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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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