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1992년 10월에 우리 집은 부천에서 고양시로 이사했다. 엄마, 아빠는 나와 동생을 서울 학교에 보내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에 사는 엄마의 먼 친척집으로 주소를 옮겼다. 내가 앞으로 다닐 학교는 ‘연희여중’으로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있었다.
전학하고 첫 등교일. 나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새 교복이 어색했다. 버스를 30분가량 타고 내린 뒤, 길을 건너서 버스를 갈아타고 다섯 정거장을 갔다. 내려서 언덕을 걸어올라 학교에 도착했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난 이미 지쳤다.
교무실로 가서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갔다. 선생님은 내 소개를 하고 자리를 정해주셨다. 긴장한 채로 앉았다. ‘아! 난감하다.’ 방석을 깜빡했다. 나는 중학교 때 무척 말라서 엉덩이뼈가 배겨 걸상에 그냥 앉지 못했다. 엉덩이가 아파서 요리조리 옮기는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방석을 건넸다. ‘와! 살았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난 벌떡 일어나 뒤에 앉은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마음 착한 아이였다. 이름은 강주연.
주연이와 있으니 슬그머니 내 옆으로 두 친구가 다가왔다. 성은이와 금주.
성은이는 나보다 키가 조금 컸고 교복치마를 다른 친구들보다 짧게 입었다. 앞머리도 동그랗게 말았다. 말투는 평범했다. ‘노는 아이는 아니고 멋 내기 좋아하는구나.’
금주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쌍꺼풀이 진해서 예뻤다. 목소리도 고왔다. 말이 시원시원해 공주 과는 아니었다. 벌써 친구를 셋이나 사귀었다. 기뻤다.
다음날부터 주연, 성은, 금주와 나. 우리 넷은 매일 붙어 다녀서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주연이네는 학교에서 내려오는 언덕 중간에서 '주연슈퍼'를 했다. 주연엄마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고, 보통 주연아빠가 슈퍼에 계셨다. 주연아빠가 식사할 때와 외출할 때는 주연이가 슈퍼를 봐야 했다. 그래서 주연이는 다양한 물건의 위치와 물건 값을 기억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면 대화하고 필요한 물건을 찾아주고, 돈 받고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일을 자연스럽게 해냈다.
성은이네는 가까워 걸어 다녔고, 나처럼 부모님 두 분이 다 일하셨다. 오빠는 경복고에 배정받아 버스를 타고 다니고 학원까지 들러 집에 늦게 왔다. 성은이는 집에 가도 혼자였다.
금주네는 2주 전에 망원동으로 이사했다. 금주의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인데, 곧 졸업이라 전학을 안 했다. 그래서 금주는 언니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토요일에 4교시 수업을 했다. 금주의 언니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밤이 되어야 집에 온다고 했다. 주연, 성은, 나 셋은 ‘금주의 방’으로 놀러 갔다. 금주의 방은 열쇠를 열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고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방이다. 방에는 아주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책장이 붙어 있는 책상, 서랍장, 천으로 된 옷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교과서와 문제집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부엌에는 싱크대가 두 개 놓여있었다. 하나에는 가스레인지가 올라가 있고, 다른 하나에는 반이 개수대, 반이 조리대였다. 그리고 옆에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싱크대 반대편에는 보일러가 있었다. 연탄보일러였다. 우리가 갔던 날 방이 차가웠다. 연탄불이 꺼져있었다. 금주는 번개탄을 들고 밖에 나가서 불을 붙여 들어왔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번개탄을 연탄에 붙이자 불이 옮겨가며 타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 엄마, 아빠가 하는 걸 보기만 했기에 금주가 대단해 보였다.
추위가 해결되자 배가 고파졌다. 금주는 밥통에 있던 밥을 덜어내고 김치를 가위로 잘게 잘라서 볶음밥을 만들었다. 나는 김치를 가위로 자르는 걸 처음 보았다. 우리는 프라이팬 가득한 김치볶음밥을 다 먹었다. 친구가 만들어줘서 더 맛있었다. 그리고 남은 밥을 마저 볶아먹었다.
그러고 나서 성은이가 가져온 015B 새 테이프를 들었다. 성은이가 오빠 것을 몰래 가져왔단다.
“걸리면 오빠한테 혼나잖아.”
우리가 걱정되어 말하니, 성은이는 눈치 못 채게 살짝 갖다 두면 된다고 했다. 혹시 들키면 오빠가 부모님 몰래 학원 빠진 사실을 이른다며, 오빠와 협상을 할 거라 말했다. 아, 역시 오빠한테서 살아남으려면 머리를 써야 했다.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을 우리는 계속 들었다. 어느새 조그만 창으로 노을빛이 드리웠다. 이제 집에 가야 했다. 그 후로 우리는 토요일마다 ‘금주의 방’에 가서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방학식 날이었다. 일찍 끝난 우리가 금주의 방에 도착하니 당연한 듯 배가 고팠다. 그런데 밥이 하나도 없었다. 금주는 언니에게 그동안 쌀이 금방금방 줄어들어서 혼났다고 했다. 금주는 “쌀이 조금 남았어.” 하면서 쌀 봉지를 탈탈 털어 밥을 했다. 이날은 김치도 없고 전장 김 한 봉지만 있었다. 우리는 뜨거운 밥에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김을 잘라 싸 먹었다. 키가 크려 한 건지 살이 찌려 한 건지 반찬이 없어도 맛만 있었다. 배가 불러 다 같이 누웠다.
그때 열쇠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다!” 우리는 냉큼 일어났다. 우리는 금주의 언니는 처음 보았다. 머리가 길고 금주와 닮았다. 우리는 어색해하며 언니에게 인사를 하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겨울방학 동안 우리는 추워서 서로 만나지 않고 전화만 했다. 집에만 웅크리고 있다 개학을 맞았다. 방학 동안 금주에게 변화가 생겼다. 금주의 언니가 졸업을 해서 자취방을 빼고 망원동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제 금주도 나처럼 통학을 한다고 했다. ‘금주의 방’이 사라졌다.
3학년이 된 우리는 각자 다른 반이 되었다. 서운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서로 기다렸다 하교를 같이 했다. 수다를 떨며 분식집에 들렀다. 그리고는 더는 갈 곳이 없어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토요일에 집에 가는 버스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훤하니 낯설었다.
떠올려보면 '금주의 방'이 있어, 하교하고 한참을 버스 타고 집에 가야 하는 내가 쉬어갈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먹고 노래하고 비밀을 나누며 우리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금주의 방에는 연탄을 갈고 밥을 하는 금주, 오빠와 협상할 줄 아는 성은, 아빠 대신 슈퍼를 보는 주연이 있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내가 있었다. 나는 ‘금주의 방’에서 나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