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나는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 위치한 중앙여고에 배정받았다. 나보다 어깨가 큰 교복 재킷을 입고 첫 등교를 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복도에 나가 일렬로 섰다. 키 순서로 번호를 정했다. 나는 중학교 때도 키가 작은 편이라 알아서 앞쪽에 서 있었다. 눈치껏 서로 키를 재고 내 앞에 몇 명을 세워 주고 나는 1학년 4반 7번이 되었다. 그리고 번호대로 앞자리부터 앉았다. 자연스레 나는 앞뒤 번호 친구들과 말을 트게 되었다. 나처럼 성격이 활발하고 솔직했다. 6번 김은진, 7번 나, 8번 장희정. 이렇게 우리 셋은 친해졌다.
나는 고양시에 살았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연세대 앞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아현동에서 내렸다. 그리고 10분을 걷거나 마을버스를 5분 타야 학교에 도착했다. 등교에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은진이는 성산동에 살았는데 내가 집에 가는 중간쯤이었다. 희정이는 아현동에 살아서 걸어 다녔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월요일에는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 튀김, 순대에 김밥, 쫄면까지 먹었다. 화요일에는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거, 감자튀김, 콜라 세트로 배를 채웠다. 수요일에는 아현동 시장골목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사 먹었다. 그러다 용돈이 떨어지면 우리는 은진이네 가서 라면을 끓여 손맛 좋은 어머니가 담근 아삭아삭 총각무와 같이 먹었다. 비가 대차게 내리는 날이면 희정이네 들러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 앉아, 아버지가 구워주시는 삼겹살을 얹어 밥을 한 공기씩 먹었다. 우리 집은 멀어서 방학에 놀러 와 함께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열심히 먹다 보니 교복 품이 맞아가고 있었다. 2학년 때 우리는 서로 다른 반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서로의 교실 근처를 배회하면서 복도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하굣길 모습은 달라졌다. 은진이와 희정이는 연극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마치고 매일 연습을 하러 갔다. 나는 우리 집 가까이에 사는 친구를 알게 되어 같이 집에 갔고, 친구집에서 함께 수학 과외를 받았다.
3학년이 되었다. 입시 준비가 시작됐다. 희정이와 은진이의 연극반 활동은 끝났고, 나는 과외를 주말로 옮겼다. 우리는 이름만 자유로운 야간자율학습을 밤 10시까지 해야 했다. 매일 새벽에 집에서 나와 한밤중에 돌아갔다. 종일 학교에서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우리 학교에는 2교시와 3교시 사이에 ‘중간체조' 시간이 있었다. 2교시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면 운동장으로 나갔다. 학년별, 반별로 조회 대형으로 서서 스피커의 구령에 맞춰 국민체조를 하고 서둘러 교실로 들어왔다. 20분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입학했을 때는 생소하면서 재미도 있었으나 3학년이 되니 귀찮아졌다. 갑자기 비가 와서 중간체조가 취소되면 우리는 신나서 매점으로 달려갔다. 날이 더워지거나 기온이 떨어지면 공식적으로 쉬기도 했다. 교실에 선풍기 2대로 폭염을 견디는 때가 왔다. 방학 전에 2주 동안 중간체조가 쉬었다. 이때 우리는 간식을 가져와 먹기로 했다.
우리 학교는 다른 반 교실에 출입금지였다. 그런데 은진이와 희정이는 3반, 나는 1반이었다. 우리는 교실 말고 간식을 먹을 장소가 필요했다. 3학년 교실은 기다란 복도에 맨 앞이 1반이고, 2반, 3반 순이었다. 그런데 2반 복도 한켠에 창가 쪽으로 불룩 튀어나와 있고 창틀 높이와 같은 자리가 있었다. 크기는 셋이서 둘러앉으면 딱 맞았다. 우리는 그곳을 이제부터 ‘우리 자리’로 부르기로 했다.
등굣길 가방은 묵직했고 내 마음은 날아올랐다. 전날에 하교하면서 식빵, 참치 캔, 옥수수 캔을 샀었다. 나는 엄마가 깨우기 전에 알아서 일어났다. 참치 캔의 기름을 제거하고, 옥수수 캔의 물기를 쫘악 빼서 마요네즈를 듬뿍 넣고 섞었다. 그리고 정성스레 식빵에 올려 두툼하게 펼친 다음 빵 한 조각을 덮고 꾹 눌렀다. 요리는 못했지만 어떻게 먹으면 맛있는지는 잘 알았다. 아침밥은 두어 숟가락 떠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1교시다. ‘아이고’ 오늘따라 수업이 지루했다. 2교시다. 선생님 말씀은 귀에 안 들어오고 시계만 자꾸 봤다. 중간체조 노래가 나왔다. “야호!” 나는 앞문으로 나가시는 선생님보다 빨리 뒷문으로 나갔다. 희정이와 은진이도 ‘우리 자리’로 왔다.
각자 싸 온 걸 펼치고 앉았다. 희정이는 학교 오는 길에 새벽에 문 여는 떡집에서 꿀떡과 절편을 사 왔다. 은진이는 꼬마 병 주스와 쿠키를 가져왔다. 내가 가져온 참치 샌드위치를 먹고 친구들이 박수를 쳤다. 역시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집에 있는 모든 걸 싸왔다. 희정이는 전날 제사 지내고 아빠 술 안주하려던 전을 가져왔다. 은진이는 오빠가 사둔 콜라를 챙겨 왔고, 나는 동생이 혼자 먹으려고 숨겨둔 과자를 슬쩍했다. 집에 가면 한 마디씩 할 테지만 먹는 동안은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이제 ‘우리 자리’에서 간식시간은 우리가 학교에서 제일 기다리는 일이 됐다. 우리는 비빔밥을 해 먹기로 했다. 희정이는 커다란 양푼, 은진이는 참기름과 김가루, 나는 고추장을 퍼오고 상추를 씻어왔다. 그리고 중간체조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리’에 모여서 양푼에 점심 도시락에 있는 밥과 반찬을 다 넣었다. 참기름 뿌리고 김가루 더하고 고추장 넣고 상추 잘게 뜯어 올리고, 숟가락으로 온 힘을 다해 비벼 비벼 먹었다. 비릿한 멸치볶음도 싫어하던 콩자반도 씹는 맛을 더했다. 세상에 이보다 맛있는 비빔밥은 없었다. 지나가던 친구가 “맛있겠다.” 부러워했다. 우리는 기분이 좋아져서 양푼을 싸악 비웠다.
3, 4 교시가 지나고 점심시간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한 개의 도시락이 남았사옵니다. 하하하.”
우리는 야간자율학습을 해서 도시락을 2개씩 싸왔다. 2차로 비빔밥을 해 먹기로 했다. 점심시간에는 복도에 학생들과 선생님까지 많이 다녀서, 우리는 ‘우리 자리’ 대신 3반으로 장소를 정했다. 희정이가 깨끗이 씻어둔 양푼에 2차로 비빔밥을 만들었다.
앗! 복도를 지나던 내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셨다. 앞문으로 얼굴을 들이미셨다. 난 입에 밥을 한가득 문 채로 얼음이 됐다. ‘걸렸다!’
“유진아! 너 아예 3 반해라.”
선생님은 한마디 하시고 웃으면서 가셨다.
‘휴우. 살았다.’
매일 붙어 다니니 선생님도 우리가 친한 걸 아셨다.
“안 혼나서 다행이다.”
“역시 매의 눈이다. 너를 어떻게 보셨냐?”
“그러게. 네~ 3반 친구들도 저 좋아해요. 3반 선생님만 허락하시면 3 반하지요.”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비빔밥을 맛나게 먹었다. 교복치마 후크를 풀어야 했다.
그 시절 우리가 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살을 빼려고 학교 뒤뜰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야간자율학습도 빠지지 않았다. 충정로에 있는 입시학원에도 같이 다니고, 시험기간에는 마포도서관에 모여 공부했다. 시험이 끝나고 함께 영화도 보고 볼링도 쳤다.
열일곱에 만난 우리는 어느새 마흔다섯이 됐다. 지금도 우리는 만나면 맛집을 찾아다니고, 먹는 걸 즐긴다. 난 지난주에 은진이를 만났다. 작년에 희정이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보고 오랜만이었다.
“학교 다닐 때 희정이 아버지가 구워주신 삼겹살 맛있었는데…….”
“ ‘우리 자리’에서 라면을 못 끓여 먹어서 아쉬웠지.”
“그 비빔밥 다시 먹고 싶다.”
고등학교 때 우리는 열심히 먹고 틈틈이 공부하면서 그 시절을 꽉 채웠다. 희정이와 은진이, 나는 건강하게 자랐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따뜻하고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