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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초이 Jul 21. 2024

비 오는 날

김치전


할머니, 기억나요?

내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어요. 하복 입었고 비가 많이 내린 날. 여름방학 시작 전 이맘때였네. 아직 우리가 부천에 살고 있었으니 1학년 여름 맞아요. 3층 단독주택에 우리는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어요.

 

학교 끝나고 우산을 쓰고 왔는데 비가 옆으로 내렸나. 여름에 종종 그러잖아요. 내 구두에 물이 고여서 처벅처벅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왔어요. 교복 치마와 블라우스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학교 규정에 따라 단발로 자른 머리는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었죠. 2층에 현관문 앞에 도착했어요. 날 더워 급급하고 비도 오는데 '드디어 집이다' 마음이 놓였지. 엄마도 일하고 낮에 집이 비니까 열쇠를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집에 누군가 있을 때는 꺼내지 않아도 됐어요. 진주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지. 진주가 "어! 누나." 하고 문을 열어주었어요. 현관에 들어서며 눈에 들어온 모습이 지금도 보이고 그 냄새가 아직도 나요.

"와, 할머니!"


그날 할머니가 계셨어요. 큰댁에서 사는 할머니는 회사 나가는 엄마, 아빠 대신에 우리 밥 차려주러 방학하면 오셨잖아요. 엄마가 직장 나간 뒤로 몇 년째 오셔서 익숙했어요. 우리 집은 현관문 열면 바로 거실 겸 부엌이었고, 할머니는 싱크대에 서 계셔서 뒷모습만 보였지.

“유진이 왔냐?” 하고 뒤돌아보시고 다시 하던 걸 하셨어요.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네. 오른손에는 뒤지개를 들고 왼손은 프라이팬을 잡고 계셨어요. 학교 갔다 오는 손주들 먹이려고 땀 흘리며 전 부치고 있는 우리 할머니. 그리고 비 오는 날 집에서 나는 고소한 기름 냄새. 푹 익은 김장김치 송송 썰어서 밀가루랑 계란 넣고 막 휘저어 노릇노릇 부쳐낸 김치전.


가방 벗어두고 옷 후딱 갈아입고 동생이 먹고 있던 상에 젓가락 들고 앉았어요.

"애는 지금 세 장째 먹는다."

먹성 좋아 통통하던 진주를 가리키면서, 막 완성된 지글거리는 전을 내 앞에 놓아주셨어요.

난 젓가락으로 죽죽 찢어서 입에 넣었지.

"어때, 먹을 만 해?"

"맛있지. 할머니가 했잖아요."


부엌에 난 자그마한 창으로 비 오는 거 보면서 먹던 김치전. 그날 비 냄새, 내게 나던 땀 냄새, 마주 앉은 동생의 발 냄새, 기름 냄새, 돌아가던 선풍기 소리, 우리가 맛있게 먹어 신나 하던 할머니.




그해 여름 내내 할머니는 밀가루를 사 와서 김치전도 해주고 수제비와 칼국수도 만들어주셨다. 그런데 할머니가 우리에게 요리해 준 밀가루는 엄마가 반찬거리 사시라고 드린 돈으로 산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가 일해서 번 돈을 쓰기 아까워하셨다. 그래서 동생과 내가 학교에 간 사이 시장에 있는 방앗간에서 고추꼭지 따주고, 콩 껍질 까주고 받은 '품'으로 밀가루를 사 오셨다. 엄마는 방앗간 사장님에게 이 사실을 듣고, 할머니에게 힘드시니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할머니는 엄마와 아빠가 출근하면 몰래 다녀오고는 하셨다.


할머니는 사는 동네가 신도시가 되면서 큰아들이 가져온 종이에 할머니 도장을 찍으래서 다 찍어주었다. 그것들이 상속 문서라 할머니의 재산을 큰아들이 다 갖는다는 건지 모르고 했다고. 글 모르고 못 배워서 그랬다고. 막내아들, 막내며느리 고생하는 게 다 자기 탓이라고 한탄했다. 나는 국민학교 때 '화병'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할머니는 큰아들이 재산을 몽땅 가져갔어도 자식이라 어쩌지 못했다. 큰아들과 같이 살면서 농사일, 밭일에 손 보태며 고되게 살았다.


할머니는 카디건에 긴치마를 입고 쪽진 머리를 하셨다. 배와 자두맛 캔디를 좋아하셨다. 내가 어릴 적 80년대에는 배가 비쌌다. 배는  명절이나 제사 때만 먹을 수 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는 시장에서 배를 사 왔다. 그리고 엄마는 월급을 받으면 할머니에게 앞섶에 꽃이 수 놓인 카디건을 사드렸다. 할머니는 화병 때문에 목이 쓰다고 사탕을 자주 드셨다.


내가 5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생도 학원 가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가 많았다. 열쇠를 꺼내 딸깍 하고 문을 열면 집의 텅 빈 공기가 나를 맞았고 난 허전했다. 온 집안 불을 켜도 환하지 않고 라디오를 틀어도 고요했다. 그러다 동생이 집에 오면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난 방학이면 할머니가 우리를 돌보러 오셔서 좋았다. 할머니가 계시면 집이 온종일 훈훈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된장찌개, 호박전, 오이무침, 임연수구이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전래 동화책을 읽어드리는 걸 좋아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 방에서 주무시면서 내가 잠들기 전까지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빠가 네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도 할머니에게 처음 들었다.


할머니는 동생과 나를 콩꼬투리라고 불렀다. 막내아들의 자식이라고 우리를 엄청 예뻐하셨다. 엄마와 아빠가 세 살면서 우리를 키우느라 애쓰는 걸 마음 아파하셨다. 할머니가 콩꼬투리들이 이만큼 커서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사는 거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그 해 가을에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 이제 더 이상 남의집살이 하면서 이사 안 다녀도 된다고 기뻐하셨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더 사실수도 있는데, 삶에 미련이 없어 스스로 곡기를 끊으신 거라고 했다. ‘화병’에 못내 그리 되셨다고 말했다.


나는 사는 게 힘겨울 때마다 할머니에게 나를 지켜달라고 빌었다. 요즘은 할머니에게 자랑한다. 

'할머니, 나 잘 살고 있지요? 거기는 어때? 보고 싶다.'

지금도 비 오는 날 현관문을 열면 할머니 뒷모습이 보인다. 가서 "할머니" 부르며 안아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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