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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헌 Oct 12. 2016

생각이 얕으면 또 어떤가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쓰다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PC통신을 쓰던 시절에도 꾸준하게 호흡이 긴 소설을 연재하고 이를 묶어다 책으로 펴낸 작가들이 있었다. 그러다 점점 글쓰기와 글 읽기가 가벼워지더니 게시판에서 블로그를 거쳐, SNS로, 140자 트윗으로, 한때는 주소록의 친구에게 YO!라고만 전송할 수 있는 앱까지 나왔더랬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 미디엄이니, 브런치니 하는 플랫폼들과, 온라인을 기반으로 긴 호흡의 컨텐츠를 생산하는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기도 하는 판이다. 결국은 이것도 저것도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사용하기를 선택한 것들 아니겠나.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면 쪼매 거창할 수도 있겠다마는, 여하튼 당대의 시대정신에 걸맞는 기술에 열광하고 이들을 열심히 쓰는 것은 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싶다. 때론 단지 새롭다는 이유로 환영받는 기술이 있기도 하다만, 그런 것도 한 때뿐일 테고. 저자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도구들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결국 사람들은 넓어진 선택지 중에서 합리적으로 취사선택을 해나가고 있다.


문득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아! 빌어먹을 기술이 내 기억력을 후퇴시켰어! 이러고 앉아있으면 좀 우스워 보이지 않으려나. 세상사 뭐든 간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게 잃는 것보다 크면 유지되고 살아남는 거라 생각하고 있다. 선택도 결정도 인간의 몫이여 에헤라디여.




토론 이후 조금 더 정리해본 것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까?

'인간이 기술을 선택하는가, 기술에 인간이 종속되는가’ 하는 재미진 쟁점이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치고받지 못한 채로 사그라들어 아쉬웠다. 나는 토론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인간이 기술을 선택한다고 믿는 쪽이다. 기술은 개발되는데서 그치지 않고, 상용화되고 대중화되어야 비로소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주관하는 것이 때론 시장일 수도 또 정책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주체는 사람이라는 거.


선택의 여지없이 카카오톡을 써야만 할 것 같고 안 쓰면 소외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또 우리 동네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 봉투가 퇴출되고 RFID 카드를 이용해 무게를 측정하고 이를 관리비에 얹어 부과하는 방식으로 쓰레기를 버리게 되었다. 조악한 예시일수도 있겠다만, 이런 일련의 흐름들을 보다보면 인간이 기술에 종속되는 게 아니겠냐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가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퇴출되는 기술과, 대중들이 열광하는 - 편승해야 할 것만 같은 기술이 생겨날 뿐이다.


인간이 기술을 선택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기술과 그 파급효과에 대해 조금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다. 공해가 될만한 카카오톡 단톡방을 거부하는 사람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다른 메신저로 이주 아닌 이주를 하는 사람도 있다. RFID카드를 활용해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민원을 제기할 수도 또 연대하여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는 일이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또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우리는 주체적으로 기술을 선택하고 이를 우리 입맛에 맞게 고쳐나가며 또 심지어는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술에 종속된다고 선언해버리는 순간, '뭐 어쩌겠어' '남들 다 쓰는데 써야지' '하라는데 해야지’ 하며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꼴이 되지 않을까. 그게 싫어서 일견 말장난 같아 보이는 쟁점이었음에도, 꽤나 여러 번 저 얘기를 끄집어내었던 것 같다.


읽는다는 것, 그 깊이에 대하여

종이책과 글로 대표되는 컨텐츠와 미디어가 기술로 대체되고 있는 현실을 저자는 개탄스러워한다. 모니터와 액정화면을 통한 읽기는 과거보다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깊은 독서와 사색 대신 정보를 단순히 훑고 해독하는 데에 그치게 되는 상황들에 대해 열심히 지적한다. 그렇게 써두니 문제인 것도 같지만, 과연 그게 진짜 문제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술은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며, 책에서 언급되는 전자책이나 하이퍼링크, 구글 검색도 그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태어난 것이다. 그 깊은 독서와 사색을 가능케 하는 컨텐츠가 너무나 많아진 반면에 이를 감당해내고 골라내고 편하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그간 소홀해왔으니까. 고로 충분히 생겨날만한 기술이 생겨난 것 뿐이다. 그리고 저자가 우려하는 대로 그래서 인간의 사고가 얄팍해지고 이게 문제가 될 즈음이면 또 누군가는 깊은 사색을 위한 도구를 발명해낼 테다. 그뿐이다.


전반적으로 부실한 논거들에 기반해 씌여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도저히 몰입이 되질 않았고, 그냥 아 역시 외국에도 꼰대 있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네 하며 슥슥 넘어갔다. 생각이 깊은 게 진짜 좋은 건지, 책을 많이 깊이 + 많이 읽는다고 똑똑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외려 책을 비롯한 남의 컨텐츠를 머릿속에 열심히 우겨넣어서 오히려 더 얄팍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허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원제는 'the shallows'란다. 이런 얄팍한 것들! 뭐 이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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