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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헌 Oct 24. 2016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싶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사회는 요원한 것일까요?

1. 

내릴 역에 다다를 즈음, 탄 지하철이 급정거를 하더니 이내 아예 멈춰서 버렸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슬슬 내릴 채비를 하고 있던 찰나였다.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문이 맞게 멈추지도 않은 와중에, 바깥쪽 스크린도어만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다가 닫혀버렸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을 큰 소리로 웅성거리고 동요하게 한 건 무신경한 안내방송이었다. 뭐라고 얼버무리듯 이유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로,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하더니 끊겨버렸다. 내려야 할 타이밍이라 일어섰던 나와 같은 이들을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붙잡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두셋은 보였다. 내 머릿속 역시, 최근 있었던 스크린 도어 사망사고를 거쳐 세월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5분여를 지나서야 지하철이 스르르 움직여 위치를 조정한 후 자동문이 열렸고, 사람들은 황급히 지하철을 뛰쳐나왔다. 이 역에 내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었나 싶었다. 아래 링크한 기사를 보아하니, 그러고 다시 출발하다가 또 급정거를 했는지 뭔지.  



2.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시기, 나는 유럽에서 교환학생 학기를 보내며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4월 16일에는 부활절 휴가 시즌이랍시고 바르셀로나로 넘어가, 어느 펍에서 친구와 함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코파 델 레이(국왕컵) 결승전을 보고 있었다. 하프타임이었던가 경기가 끝나고였던가, 속보라며 나온 소식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국에서 페리호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느지막이 한인민박으로 돌아가서야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찾아보는데, 전원 구조랬다가 아니랬다가 오보랬다가 도대체 그 하루 새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더라.


서론이 길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그 시기 한국에 없었기에, 참사에서 비롯된 세월호 트라우마에서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앞서 쓴 어제의 귀갓길 지하철에서 감금 아닌 감금을 겪으니, 또 그렇지는 않았던 듯싶다. 소위 인재人災라 불리는 상당수 사고들의 원인은 관리/감독을 맡은 이의 실수와 부주의였다. 이를 또 한 번 더 파헤쳐보면 결국은 실수와 부주의가 용인되거나, 혹은 실수와 부주의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그 원인을 물을 수 있겠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





3.

돈을 지불하고 교통수단을 타는 이유는 이 수단이 나를 안전하게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에 데려다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여러 공정과 유통과정을 거쳐 대형마트에까지 입점한 가습기 살균제를 살 때 죽을 걱정을 하지는 않았을 테다. 한데 요새는 이런 사소한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뉴스 기사를 읽을 때도 기레기를 걱정하고 허위와 편파를 걱정한다. 더군다나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가는 공권력에 목숨을 잃을 걱정을 해야 하는 판이 되었다. 이제는 좋건 싫건 민의를 모아 뽑은 대표자가 비선 실세의 꼭두각시라는 의혹마저 나도는 와중이니 아아, 참 씁쓸하고 재미지다.


일대일 개인 간의 약속이라면 에헤이 약속도 안 지키는 놈일세 하고 손가락질하고 넘어가면 그뿐이지만, 기업과 기관과 국가씩이나 되어서 내건 약속이 안 지켜지면 사람들이 굶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또 죽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들에게 약속을 지키라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낸 돈에 대해, 들인 시간에 대해, 또 써낸 표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니까.


혼자서는 조금 힘들 것도 같다만, 또 이미 이 세상에 누군가는 나보다 앞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더라. 그러니 앞으로는 돈 열심히 벌어 적은 돈이나마 조금씩은 후원할란다. 시간이 나면 시간도 좀 나눌란다. 아, 표는 물론이다. 그렇게 이 구구절절한 글로, 각자도생 하지 말고 냉소하지 말고 함께 기대 봐야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새삼 다짐해봤다. 이렇게 다짐을 안 남기면 까먹으니까. 그리고 그 이전에,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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