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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헌 Oct 21. 2017

포항에 다녀왔다

역시나 마음 무거웠던 2017년 추석 연휴의 기록




1.

포항에서의 이틀은 예상했던 대로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잠 많이 자고 밥 잘 먹고 약 잘 챙겨 먹어서 며칠째 나를 괴롭혀댔던 감기몸살을 떼낼 수 있었던 데에 의의를 둔다. 뭐 사실 포항에 안 왔어도 긴긴 휴일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기는 하지만은.



2.

두 번째 기일이 이제 막 지났는데, 아직도 포항 집에는 정리하지도 버리지도 못한 동생의 물건들이 많았다.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자리를 채운 사람들보다 자리를 비운 동생의 빈자리가 먼저 보인다는 엄마였다. 아마 엄마는 아직도 동생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니 정리는 오늘도 내 몫이었다. 나 역시도 동생의 흔적들과 기록들을 대면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어디 부모님만큼이겠나. 그리하여 마음 같아서는 밑줄 하나 접힌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책마저도 동생이 고르고 샀겠거니 하며 남겨두고 싶긴 하지만, 고르고 골라서 버리고 또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3.

지난번 설날의 나 홀로 대청소 때는 동생의 어릴 적 일기장을 찾아 넘기다가 내 욕이 한 바닥 가득인 페이지를 발견했었다. 그깟 온라인 게임이 뭐 별거라고 동생이 하던 컴퓨터를 우격다짐으로 뺏었던가, 하면서 후회를 참 많이 했었다. 오늘은 정리되지 않은 채 사진관 봉투에 들어있던 사진들을 열어봤다. 어깨동무한 폼이며 표정 하며, 어렸을 적 우리도 친하고 다정했던 시절이 군데군데 있었구나 싶어서 나 혼자서 괜스레 좋아했다.


실은 나조차 기억 못 하였던 그런 순간들을 동생이 기억해주며 떠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소한 찰나에 대한 기록들이 합리화라는 과정을 통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기댈 구석이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나 역시 앞으로는 싫은 것 아쉬운 것에 대한 이야기들보다도 더 많이, 좋은 것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말아야지. 궁금해진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을까. 또한 나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되면, 누구에 대한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며 잠이 들게 될까.


4.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수차례 수십 차례 맞닥뜨린 사소한 질문에 사소하게 대답하는 데는 이제 익숙해진 것 같다. (형제 있으세요? - 외동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동생의 정말 갑작스러운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떠남 이후로는, 인생이라는 것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과정이 더 어렵고 헷갈리는 것이다. 오늘은 문득 반년만에 뵌 팔순 넘으신 할머니의 빠진 치아들이 너무 신경이 쓰여서, 며칠 몇 주라도 길게 내려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까 하는 충동도 들었다. 모르겠다. 때론 모든 게 다 중요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세상만사가 죄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단기 계획과 장기 계획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도 있다. 심지어 앞서 쓴 것처럼 계획과 계획 밖의 충동이 싸우기도 한다. 한가로운 연휴를 맞이하여 고향에 내려오면, 외면해왔던 이런 고민 아닌 고민들이 내 발목을 잡는 것 같다. 포항에 내려오는 마음은 그래서 늘상 가볍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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