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뜀박질을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놀 때지만, 첫 마라톤에 나가 달린 건 약 12년 전인 2012년 11월 11일 제10회 스포츠서울 마라톤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금은 쌀쌀했던 가을날 대회당일은 마침 보슬비가 내렸다. 상암월드컵경기장 인근 평화의 광장에서 시작해 경로를 따라 5km를 뛰었다. 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동네 학교 운동장을 뛰며 몸을 훈련시켰다. 학창 시절 체력장을 하며 오래 달리기 기록을 잰 것을 제외하고는 길게 뛸 일이 없었던 나로서는 당시 5km를 뛴다는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학교 운동장을 달리며 '내가 다 뛰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런 불확실함 속에서도 5km쯤은 뛸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내 안에 있었다.
대회 당일 비가 내리는 거리를 보며 '아, 대회 못 나가겠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방수되는 옷을 하나 더 걸치고 뛰어야겠는걸' 말하고는 레오에게 파란색 배트맨 점퍼를 빌려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집에 뛰어갔던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비 오는 날 달리기를 할 수 있었기에 설렜다. 그리고 혼자 청승맞게 뛰는 달리기가 아닌 참가자들이 다 함께 빗속을 달린다는 남모를 낭만에 젖어 있었다.
배번호를 앞뒤로 달고 마라톤 기록칩을 신발에 부착하고 출발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첫 마라톤은 달린 다기보다는 달리기-걷기-달리기-걷기의 반복이었다. 달릴 때는 페이스를 너무 높여 숨이 차고 힘들어서 걷게 되고 걷다 보면 또 뛸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가 생겨 다시 달리고, 그러다 걷고가 반복되었다. 마라톤이 걷는 대회가 아니라 뛰는 대회라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첫 마라톤은 그렇게 걷고 뛰다가 결승점에 도착하였다. 당시에는 5km를 뛰어냈다는 사실과 화려하지는 않지만 48분이라는 나의 공식기록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나의 첫 마라톤이 비 오는 날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게 나의 뇌리에 박혔다. 이후로 마라톤에 몇 번 더 나가 달렸고 지금에 이르렀다.
당시에 갑자기 첫 마라톤 대회를 나가게 된 건 노주언니(글에 나오는 모든 지인은 가명으로 기재)의 연락 때문이었다. 노주언니는 함께 일했던 동료였다. 내가 회사를 옮기게 되며 자주 만나진 않아도 종종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근황을 나눴다. 친구들과 마라톤을 신청했는데 나도 신청해서 함께 달리지 않겠냐는 메시지였다. 살면서 마라톤 대회를 함께 나가자는 제안(?)을 받은 건 처음이었고,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마라톤'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호기심 많고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하고 대회 신청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그때 어렴풋이 나에게 자발적 달리기라는 씨앗이 심겼던 것 같다.
5km를 완주했다는 기쁨에 넘쳐 다음 해 3월 말에 열리는 2013 국제평화마라톤 대회의 10km 코스를 신청했다. 결혼기념일인 3월 31일 즈음해서 제주도로 여행 계획을 세워뒀었는데 마침 서울로 올라가는 31일에 '국제평화마라톤'대회가 열렸던 것! '옳다구나!' 생각하고는 바로 신청을 마쳤다. 언제나 나의 손과 결제는 내 머리의 생각보다 한 템포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뭐든 신중하기보다는 일단 결심하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비 오는 날 달렸던 첫 마라톤의 설렘만큼 제주에서의 마라톤은 떨림 그 자체였다. '내가 제주에서 달린다니!' 이번 코스는 한림체육관에서 달리기 시작해 해안도로를 따라 뛰다가 반환점에서 같은 길을 돌아오는 것이었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양옆 그리고 앞뒤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견뎌내며 뛰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나의 덩어리 같았던 참가자들은 출발점을 떠나자 자신의 페이스를 그리며 달려 나가 금세 흩어졌고 어느덧 나는 중하위권 무리에 속해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달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장애인 참가자들이었다. 묵묵히 자신의 배번호를 달고 뛰고 있는 장애인 참가자들을 보며 그들도 이 순간만큼은 완주라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달리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맛바람 따위, 바닷바람 따위 하며 나의 달리기를 이어가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앞서 달리는 그들을 페이스메이커 삼아 '나도 해내자'라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반환점을 돌아 달리고 달려 1시간 18분이라는 기록으로 10km를 완주했고 결승점에서의 환한 기념사진과 메달이 남았다. 그리고 그날의 힘들었던 과정은 어느새 잊혀갔다.
그렇게 마라톤 대회를 중간중간 나가기도 하고 신청했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도 하면서 어느새 10여 년이 흘렀다. 마흔 즈음에 달리기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몸의 변화 때문이었다.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몸의 움직임은 의도하지 않으면 거의 없었고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을 내리 앉아있는 일도 많아졌다. 운동을 종종 하긴 했지만 정말 종종 했었기에 단단한 근육이 유지되지 못했다. 뭔가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주변에 달리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났다. 달리기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 가는 걸 보며 오래전 내 안에 심겼던 작은 씨앗이 움트려는 조짐을 느꼈다.
지금은 아침 달리기를 주 2~3회 꾸준히 해 나가고 있다. 다시 마라톤 대회에도 신청했다.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열리는 다시 뛰는 마라톤은 나의 첫 마라톤이 시작된 상암에서 출발할 예정이다. 오랜만의 마라톤이었지만 10km를 신청했다. 뭔가 5km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10km를 목표로 정했다. 대회 등록을 마치고 아침 달리기를 하면서 5km를 뛰어 보았다. 기록은 35분이 나왔지만 정말 힘겹게 뛴 것이었기에 10km를 달리는 것이 가능할지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다. 이번 대회의 목표라 한다면 '완주'이다. 그냥 완주는 아니고 '끝까지 걷지 않고 완주하기'이다. 마라톤은 걷는 대회가 아닌 달리는 대회니까.
당신의 첫 본격 달리기는 언제였나요? 마라톤을 뛴 경험이 있다면 첫 마라톤의 기억을 나눠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