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한 고개를 넘었을 뿐.
아침에 일어나 부동산 사장님이 출근할 시간이 되면 나도 이제 긴장이 된다. 이번 주는 거의 매일 집을 보는 사람들이 왔다. 시간 약속이 잡히면 아이들을 깨워서 밥을 먹이고 집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이 생활을 한 달쯤 하니 이제 나도 지친다. 오른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리는 걸로 보아 손가락 관절염인 것 같다. 예전에도 집을 빼느라 매일 최선을 다해 청소를 한 덕분에 손가락 관절염으로 정형외과 치료를 꽤 오래 받은 적이 있다. 나도 이 짓을 그만둬야 했다. 이제는 연락이 오는 대로 집을 보여주는 것도 최선은 아니었다.
오늘도 아침에 전화가 왔다.
- 오늘 한시에 집에 계시나요?
- 네.
- 집을 보러 오시겠다는 분이 계세요. 이분도 급하게 집을 알아봐야 해서 왔는데, 3월 초에 입주 가능하다고 하세요. 그때 뵐게요.
10시에 아이들을 깨웠다. 이번 주는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했다.
-얘들아 오늘 한시에 집 보러 오신대. 이제 일어나서 아침 먹자. 너희 아침 먹은 거 설거지하고 엄마가 잠깐 집정리 좀 할게. 집 보여준 다음에 바로 나갈 거니까 옷 갈아입고.
우리는 집을 보여주고 외출을 한다. 다른 날과 다르게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지만 춥다고 매일 집에만 있을 수 없으니 매일 아이들과 밖으로 나갔다. 아침잠이 많은 둘째가 눈을 뜨지도 않고 말한다.
- 엄마, 이제 사람들한테 우리 집을 그만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다. 집 보여 주려다 내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자금 계획도 세워놨다. 일단 가진 돈으로 잔금은 치르고 나머지 대출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늦은 아침, 아이들 밥을 먹이고 청소도 마무리했다. 12시 30분.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 지루해서 컴퓨터를 켰다. AI에게 잔금을 제때 못 받으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봤다.
Q. 아파트를 매수하는데 전세 자금이 묶여서 2억 대출이 필요해. 대출은 미리 받아두는 게 좋을까?
- 빚을 미리 '실행'해 이자를 낼 필요는 없지만, 대출 '승인'은 넉넉히 받아둬야 합니다. 아파트를 매매할 때는 취득세와 복비 등 부대비용 2,500만 원가량 추가로 발생하므로 2억보다 2.5억을 신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Q. 명절이 껴서 대출 심사가 늦어지면 어쩌지? 비대면이 나을까?
- 2월 초에 계약을 한다면 명절이 있어도 2월 말 잔금은 충분합니다. 또한 비대면 대출 상품의 경우 중도상환수수료가 없어, 한 달 뒤 보증금을 받는 즉시 갚아도 수수료가 0원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Q. 법적으로 집은 계속 보여줘야 하나?
- 집을 보여줄 법적 의무는 없으나, 힘드시다면 요일과 시간을 정해서 보여준다는 조건을 거세요. 집주인에게는 전세금 반환 지연에 따른 대출 이자 화면을 캡처하여 이 금액을 추가로 청구하겠다고 연락하세요.
AI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시간이 금방 갔다. 어느덧 한 시, 집 보러 온다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약속이 없어도 나가려 준비를 마쳤기 때문인지 기다리는 시간은 더뎠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집 앞에 부동산 사장님과 낯선 모녀가 보였다. 문을 열어주자 사장님이 집을 소개했다. 이번 달만 스무 번 정도 했나? 거의 매일 집을 보여주다 보니 나도 반복되는 말에 이골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별말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을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하시던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 네, 도착하셨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저 사모님, 오늘 부동산에 잔금 치르러 오시는 분이 막 도착하셔서 저 먼저 갈 테니까 집 소개 좀 해주세요.
-네?
-집 보러 오신 분, 제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궁금한 건 이분께 물어보시면 잘 대답해 주실 거예요. 먼저 가겠습니다.
집에는 나와 두 아이와 집 보러 온 모녀 둘이 덩그렇게 남았다.
나는 사장님이 집을 소개해줬던 패턴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대로 말씀을 드렸다. 따뜻하고 해가 잘 들어오며 학교와 편의시설이 가깝다는 점. 주변에 학원가가 잘 되어있고, 강남 가는 광역버스와 지하철역으로 바로 가는 마을버스를 아파트 정문에서 탈 수 있다는 점도 어필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딸을 키우는 분은 이미 아이들이 진학할 학교를 점찍어 두셨고, 그걸 염두에 두고 딱 두 아파트만 보러 왔다고 했다. 예전에 나와 똑같다. 나도 이 동네에 오면서 두 아파트만 봤으니까.
팬트리와 수납장은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있는 수납장 문을 열어 모두 보여드렸다. 마침 나는 수납장은 모두 정리해 놓은 상태라 선반이 텅 비어 있거나 가지런히 정리된 상태였다. 20분쯤 지나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아이들과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약속도 없고 일정도 없다. 하릴없이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식당에 앉아 쌀국수를 시켜 먹었다. 시간은 가고 일은 풀리지 않으니 답답했다. 하지만 아이들 앞이니 웃어야지. 힘들어도 웃어야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 한 팀 더 오려나 너무 늦게 오면 안 보여 준다고 해야지라고 다짐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사모님. 아까 보신 분이 계약을 하시겠다고 하세요. 입주가 2월은 불가능해서 잔금은 2월에 드릴 수는 없고 언제가 좋으세요?
-3월 첫째 주가 좋아요.
- 그럼 일단 날짜는 3월 6일로 잡을게요.
-더 당길 수는 없나요? 3월 초로요.
- 그럼 현세입자의 이사 상태에 따라 3월 2, 3일로 일정을 당길 수도 있다는 특약을 넣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듣던 아이들도 좋아했다.
- 엄마, 그럼 이제 사람들이 우리 집 보러 안 와?
- 응
-와, 좋다. 이제 맘 편히 놀 수 있겠다.
남편에게도 연락했다.
- 남편 오전에 집 보러 온 사람들한테 집 나갔어. 잔금일도 3월 초로 맞춰줄 수 있다고 해서 괜찮을 것 같아.
- 오, 잘됐네. 한 달 동안 집 보여주느라 수고했어.
이렇게 집이 나갔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무겁다. 이제 한 단계가 지나갔고, 기간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한 달 동안 내가 살 집을 찾고, 계약서를 쓰고, 이삿짐센터 견적을 받고, 아이들 전학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2월 마지막 주는 나도 새로운 학교로 출근해야 한다. 날짜로 보면 한 달이지만 일수로 보면 15일이다. 보름동안 내가 살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남편과 통화했다.
-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이제 우리 같이 집 보러 다니면 되겠다.
그리고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 **아파트 전세가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나는 전세를 살며 더 이상 이사 다니고 싶지 않은데 남편은 또다시 전세를 찾고 있다. 이제 새로 들어올 세입자가 아니라 남편을 설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