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내 돈인데 마음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오늘은 원래 2시 30분에 집을 보러 온다고 했는데, 11시 20분에 부동산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 11시 50분쯤 가도 될까요?
- 네 그럼요, 오세요.
어제 아파트 분리수거 날이라 집을 한번 싹 비웠다. 책장을 2개 비우고 당근 마켓에 드림했고 장난감도 분리수거했다. 옷도 100리터 비닐을 가득 채워 수거함에 넣었다. 집은 더 밝고 휑해졌다. 어제 고생한 덕분에 오늘은 따로 정리할 것도 없다. 늦게 일어난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한번 돌렸다. 11시 50분에 벨이 울렸다.
오늘 집을 보러 온 분은 노부부였다. 서울에 사는 분들이었는데 아들 내외가 사는 동네 근처로 이사 올 집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집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이 오갔다. 할아버지가 아파트 관리비를 질문하셔서 평균 28만 원 내외로 나온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하셨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온 풍채 좋은 할아버지가 집을 매우 꼼꼼히 봤다. 오전에 설거지를 하면서 물티슈로 가스레인지를 한번 닦았는데, 그래도 얼룩은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스레인지를 흔드셔서 분리해서 청소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노부부는 장장 25분간 집을 보고 가셨다. 따뜻한 집이라 좋은 인상이 남길 바란다.
집 보러 온 사람들이 떠나고 나는 짐을 챙겨 은행으로 갔다. 오늘은 대출을 알아보러 가기로 했다. 며칠 전 연말정산을 할 때 대출할 때 필요한 서류를 모두 발급해 둔 상태였다. 재직 증명서, 건강보험 납입 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주민등록 초본, 2년 치 원천 징수 영수증까지. 대출이 얼마가 되는지, 금리는 어느 정도이고 월 상환은 얼마로 잡는 것이 유리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2번 정도 알아봤는데 창구에서 상담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안녕하세요? 대출을 알아보러 왔어요.
- 네, 대출 신청 동의서 작성하시면 순차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서류는 다 챙겨 왔는데, 바로 알 수 없나요?
- 이미 저희와 계약하신 분이 100분이나 계셔서 그분들 DSR 확인하고 안내드립니다. 계약서나 등기 가지고 오셨어요?
- 아직 계약서는 없고요, 어느 지역 어떤 아파트를 갈지 정해놨어요.
- 담보물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용조회를 하게 되면 신용도가 바뀌어서 대출 금리가 달라질 거예요.
- 아, 저는 서류를 준비해서 은행에 신청하면 제 대출금을 바로 알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인터넷으로 두 번 알아봤는데 금방 알 수 있었거든요.
- 인터넷은 그렇죠. 창구는 순차대로 합니다. 여기 이 서류 보세요(창구 뒤 수납함 여닫이를 열어 보여준다). 먼저 대출 신청하신 분들 서류예요. 이 서류가 다 확인되면 그다음에 조회 가능하세요. 만약 된다고 하더라도 금리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조회 신청일이 아니라 대출금이 나올 때 기준으로 금리가 정해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알고 싶었는데, 직원은 귀찮은 눈치다. 은행에 예적금을 하러 가면 직원들이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는데, 대출을 받으러 가서 그런 건지 점심때 찾아가서 그런 건지 매우 불친절했다. 직원이 나한테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대기하는 사람도 없는데 좀 자세히 알려주지. 대출이자로 먹고사는 은행인데 대출자에게 이토록 까다롭다니. 은행에 앉아있으면서 처음으로 서글퍼졌다. 그냥 가기 아쉬워서 몇 가지 더 물어봤다.
- DSR 그게 제가 가지고 있는 대출을 확인해서 가능한 대출금을 확인하는 건가요?
- 네 맞습니다.
- 저는 대출이 없는데요. 대출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 대출이 있든 없든, 서류 검토하고 신청하는데 시간은 걸려요. 만약 신청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돈은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대출 상담을 받기 위해 가져온 서류를 품에 안고 아쉬운 마음으로 은행에서 나왔다.
우리는 당장 2월 말에 이사를 가야한다. 여기서 근무 예정지(아직 발령은 안 났지만)까지 너무 멀고, 아이 둘 전학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내놓은 이후 보겠다는 사람 있으면 그때마다 집을 정리하고 쓸고 닦았다. 처음에는 그게 집주인, 부동산 사장님, 나에게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전 부동산 사장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사모님, 요즘 집 보러 오는 사람은 빠르면 3월 초순, 늦으면 4월 중순에 이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알고 계세요.
- 네, 그런데 저희가 이사를 먼저 가게 되면 보증금은 어떻게 되나요?
- 집이 비는 건 상관없는데, 전세금은 다음 세입자가 들어와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2월 말 이사면 이사비도 400만 원 정도 할 텐데, 아마 이삿짐센터 잡기도 힘들 거예요. 어쨌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반사적으로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 난 뒤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집을 보여 줄 의무가 있는가?'
-아니. 왜냐하면 계약기간 동안 내가 사는 곳인데 굳이 낯선 사람들에게 공개할 이유는 없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나중에 준다고 미룰 수 있는가?'
- 원칙대로라면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지급해야 한다.
은행에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면박을 받고 난 후 나는 대출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대출을 최소한으로 받으려면 전세금을 받아야 한다. 내가 맡긴 돈인데 계약기간 다 마칠 때까지 돌려줄 수가 없다니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밖에 외출했다가 집 앞 부동산에 들렀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8**동 ***호 세입자예요.
- 네, 어서 오세요.
-요즘 집 보러 온다는 사람 별로 없네요. 지난주에는 두 팀 왔다 갔는데 별 소식도 없고.
-보통 이사하기 전에는 석 달 전에 집 보러 오는데 사모님 댁이 날짜가 촉박하죠.
-그런데 집이 안 나가면 우리 돈은 받을 수 없는 건가요? 그거 없으면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심사에만 한 달 걸린다고 하고,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확실치도 않고요. 아니면 급하게 신용대출이라도 받아야 하거든요.
-대출 얼마 받으려고요?
-2억이요.
-신용 대출은 1억밖에 안 나와요.
-모자란 돈은 부모님이나 동생한테 여유 있는지 물어보고 잠깐 빌려야죠. 그런데 전세금을 안 주셔서 저희가 대출을 받게 되면 그 이자는 누가 내요?
우리는 전세보증보험을 들어놓아서 돈을 떼일 걱정은 하지 않지만, 전세 보증보험금도 신청해서 받으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주인도 내 돈을 안 주고, 보증보험도 보증금을 바로 지급하지 않는 기간 동안 나는 온전히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거다.
생각을 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난 것도 아닌데 집을 보여 주는 것은 순전히 집주인에 대한 나의 호의였다. 호의가 당연해서 권리인 줄 아나. 최소한 나는 고마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계약서 대로라면 약속한 날짜에 돈을 돌려주셔야 하잖아요.
-그런 그렇죠. 그런데 그 큰돈을 누가 통장에 갖고 있어요. 저축을 했든지 뭘 사놨든지 했겠지.
-그 돈을 받으면 저희가 은행에 대출받지 않고 집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돈이 없으면 주담대든 신용대출이든 받아야 하거든요.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을 수 없으면 대출이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궁금해서요.
-그건 집주인과 직접 통화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사장님과 통화 자주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얼마 전에 주인이 집 수리해 주신다고 하셨다고 사이즈도 재어가셨잖아요.
-아, 맞다. 그거 연락드려야겠다. 연락하는 김에 한번 메시지 보내 볼게요.
- 네 알겠습니다.
부동산 사장님이 집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걸 보고 있다가 '먼저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하고 가게를 나왔다.
'법이 뭐 이래'
집을 사용하는 대가로 낸 보증금은 집주인이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돈을 계약이 만료되는 날 돌려줄 수 있다고 집주인은 나에게 보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전세보증보험은 세입자가 아니고 집주인이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세 제도가 문제가 없으려면 집을 빌려주는 대가로 돈을 가져간 사람이 세입자에게 돌려줄 수 있는 신용이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국가 기관에서 확인해 줘야 하지 않나?
하지만 현실은 집주인이 보증금으로 가져가고 세입자는 그 돈을 지켜달라고 나라에 또 돈을 낸다. 집주인은 보증금을 늦게 준들 별 타격이 없다. 하지만 세입자는 그 돈이 있어야 다음 집을 구하는데, 보증 보험이라도 청구하려면 아무 잘못 없는 세입자가 직접 수많은 서류를 준비해서 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집주인인데, 고생은 세입자만 한다.
법이 바뀌어야 한다.
'전세 보증 보험은 집주인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보증 보험은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되는지 심사해야 한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주지 않으면 페널티를 줘야 한다(매월 원금*기준 금리 *10배에 달하는 이자를 계산하여 미뤄진 일수만큼 세입자에게 지급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전세금을 받지 못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세입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
'보증금을 기한 내 지급 안 하고, 한 달 동안의 지연 이자도 지급하지 않으면 세무조사에 들어가거나 담보물을 압류해야 한다'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담보물이나 우선권을 세입자에게 줘야 한다.'
'집주인이 받은 보증금은 자산이 아닌 일정 기간 이후에 돌려주어야 할 부채로 처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세입자가 따로 주민선터에 전입 신고를 하거나 확정일자를 받지 않아도 매매가 체결되면 부동산에서 자동으로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등록하고, 전세 보증금이 해당 부동산과 관련된 모든 채권에 우선하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 은행은 그 돈 없이도 망하지 않겠지만 당장 그 돈이 없으면 세입자와 그 가족은 한순간에 길거리에 나앉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낸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세입자의 잘못이 아니니까.
내 집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내 돈의 소유권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힘 빠진다. 법은 있는 자는 지켜주고 없는 자는 한없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내 돈이지만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 내 집은 어디에 있고, 내 돈은 언제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