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 VS 0.1%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남편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새 회사는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 반정도 걸린다. 남편에게 낮에 아이들과 있었던 일, 한시에 집 보여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회사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회사는 복지가 좋아서 병원비가 지원이 되는데 내가 오후에 스케일링받았다는 말을 듣고 치과치료를 시작해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새로 입사한 회사는 이전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지가 좋다. 명절비에 휴가비도 나오고, 본인과 가족의 병원비도 50% 정도 보험과 무관하게 지원된다. 주말에 출근도 적고, 출장도 거의 없는 데다 혹시라도 출근할 일이 생기면 수당도 지급된다. 매달 출퇴근 교통비(주유)도 지원되고, 구내 식사도 삼시세끼 무료다. 아직 먼 이야기지만 아이들 대학 학비도 지원된다.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전근 신청한 곳으로 이사를 가면 회사가 차로 10분 거리라는 것이다.
현재 남편 회사는 차로 25분 거리에 있었지만 퇴근이 늦고 거의 매주 주말에 출장을 다녔다. 초등 아이 둘 맞벌이지만 도우미를 쓸 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에 살림하며 아이들을 오롯이 내가 챙기고 있다. 가끔 나나 아이가 아프면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까이 남편이 있어야 급할 때 바로바로 SOS를 칠 수 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남편은 이직하고 싶다는 남편을 만류해 왔지만 작년 가을, 결국 승낙해 줬다. 새로 입사한 회사는 남편도 나도 그렇게 긴 시간 고민한 끝에 가게 된 회사다.
하지만 남편은 며칠 전부터 계속 이렇게 말했다.
- 그래도 다녀야겠지? 여기는 이사 가면 집이랑 더 가깝고, 복지가 좋으니까.
- 당연하지. 내가 왜 전보를 신청했고 아이들이 왜 전학을 가는데... 다 당신 따라가는 건데...
- 하아~ 맞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를 해도 다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
- 나이도 있는데 이직한 회사가 낯설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당신은 지금 겪지만 나나 아이들도 한 달 뒤에 이사 가면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상태로 타지생활 시작하는데... 우리 모두 다 똑같아.
-... 지금 원래 회사로 돌아간다면 늦겠지? 혹시 모르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해 보고 싶어.
- 무슨 소리야? 그럼 우리가 이 짓을 왜 하는 건데? 그리고 당신은 회사의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이야. 다시 돌아간들 예전처럼 당당하게 일할 수 있어?
- 그렇겠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편은 전화통화를 하겠다고 했다.
- 예전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국대 법대 나온 경비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랑 전화 좀 하고 올게.
- 왜? 무슨 이야기.
- 회사 분위기 좀 알아보려고.
- 퇴사한 회사 분위기 알아봐서 뭐 하게?
-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없다는 거 알지만 이 회사에 계속 다니려면 재입사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확인해야겠어.
- 무슨 소리야? 다시 거길 왜가?
- 확인이라도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전화를 마친 후 남편이 말했다.
- 경비 아저씨가 대표님한테 인사겸 전화드리면서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시네. 그래야 평생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 하면서.
동국대 법대를 나온 경비아저씨는 남편이 원하는 말을 들려준 첫 사람이다. 지난 열흘간 남편이 통화를 시도한 어느 누구도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비아저씨만 남편이 원하는 말을 정확히 들려준 거다.
- 전화? 미쳤어? 그걸 말이라고 해? 오라고 하면 갈 거야?
- 가야지.
- 나랑 애들은?
- 0.1%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해야 평생 아쉽지 않을 것 같아. 평생 아쉬움 속에 살 순 없어.
남편은 이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바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5분 뒤 남편이 돌아와서 말했다.
- 대표님이 월요일에 인사팀에 바로 전화 넣을 테니까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네.
- 99.9% 안될 거라고 했잖아.
-......
나는 울었다. 울음이 아니라 포효였다. 남편은 회사를 옮기고 싶다고 2년 전 처음 말했을 때부터 줄곧 거절했지만 지난가을 한번 해보라고 승낙했었다. 이후 석 달간의 긴 입사 시험과 심층 면접을 통과하여 드디어 당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회사에 붙어서 회사를 다닌 지 열흘. 그중에 8일간은 퇴사처리조차 안 돼서 내내 마음을 졸였었다. 하지만 입사한 지 이틀 만에 남편은 원래 다니던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남편이 원래 회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면 이렇게 원망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새 회사 근처로 전보를 내서 발령을 기다리고 있고, 전세 집까지 내놓고 드디어 오늘 집이 빠졌는데 남편의 말을 들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가면 차로 10분 걸리는 새직장을 앞에 두고 편도로 한 시간 반 걸리는 기존 회사로 다시 출근하려고 한다. 전에도 잦은 출장과 야근으로 힘들었는데 남편이 이제 출퇴근에 하루 3시간을 바치면 모든 육아와 집안일은 오롯이 내 몫이다.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남편의 말을 듣고 책상 앞에 앉아서 목놓아 울다가 벌떡 일어났다. 내 앞에 고개 숙이고 앉아있는 남편을 잡고 있는 힘껏 흔들었다. 놀란 아이들이 울면서 내게 붙었지만 나는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세 번 이사를 할 때마다 손마디가 부서져라 쓸고 닦고 정리할 때 남편은 자기 방을 치우기는커녕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가 다였다. 오늘에야 그 고된 여정이 끝났는데 시간 쓰고 몸 버려가며 내가 한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출퇴근만으로도 피곤해서 널브러질 남편을 대신해 모든 육아와 집안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너무 불쌍했다. 울다 지쳐 쓰러져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