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아이 둘에 오십넘은 애도 키우면서
습관이 참 무섭다. 그 난리를 피우고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늦긴 했지만 7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필사를 했다. 이 상황에서 책이 머릿속에 들어가겠냐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 그리고 책 속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그래도 인생은 흐른다.'
아침 루틴을 마치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잠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 아이들 옆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평소에 낮잠이라면 억지로라도 참는 나인데, 깨어 있어 봤자 머리만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오후 한 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 아빠가 아침은 챙겨줬어?
- 아니.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아이들 끼니는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은 힘들고 괴로울 때 늘 자기감정이 우선이다. 자신은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면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먹어도 아이들 밥은 챙겨주지 않는다. 속으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이들 앞이라 내색하지 않았다. 어제 그 일을 겪고 아이들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후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랑 카페 갈 사람?
-가서 뭐해요?
-그냥 맛있는 거 사 먹으면서 책 읽는 거지 뭐.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답답하잖아.
아이들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남편과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남편이 나갈 생각이 없다면 내가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책을 읽으며 정신을 잠깐 다른 곳에 놓고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바라보다가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을 골랐다.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 내가 꺼내 읽는 책이다.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단골 카페로 갈까 하다가 내 표정이 평소와 달라 괜히 신경 쓰일 것 같아 그냥 잘 안 가는 곳으로 골랐다. 아이들이 원하는 메뉴를 하나씩 시키고 나도 커피를 한잔 시켰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인생은 지도에 나오지 않은 길을 탐험하는 것이다.'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으니 해가 지기 시작한다. 카페가 어두워지자 더 이상 책을 읽기 어려워져 하는 수 없이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여전히 방구석에 누워 사람들과 통화 중이다. 아이들 저녁을 챙겨주고 설거지를 마친 후 나도 책상에 앉아 늘 하던 일을 했다. 책 읽기와 글쓰기.
'똑똑'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남편이 들어왔다.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는데, 서울 본사는 자리가 없다고 하고 남은 건 내가 원래 다녔던 부서랑 시공팀이랑 지방에 있는 공장인데, 시공팀은 출장이 너무 잦고 지방에 있는 공장으로 내려가려면 주말 부부를 해야 할 것 같아.
난 오후에 카페에서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단,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은 안돼. 그러려고 이 사달을 낸 건 아니니까. 시공팀이나 지방으로 가는 건 난 상관없어. 어차피 출퇴근 세 시간이면 피곤해서 퇴근하면 집에서 잠만 잘 테고, 평일에는 얼굴 볼 시간도 없을 텐데 뭐. 나는 당신이 지방으로 며칠씩 출장을 다니든, 회사 기숙사에서 살든 똑같다고 생각하니까.
주사위를 남편에게 넘겼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야. 나는 당신의 일과 관련해서 어떤 일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 나 때문에 이렇게 산다는 원망을 평생 듣기 싫거든. 그리고 미래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당신이 지는 거야.'
내 말을 들은 남편은 다시 자기만의 굴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내 할 일을 했다. 6시에 알람이 울리고 6시 30분에 일어났다. 스탠 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 페퍼민트 티백을 우려 마시면서 책을 읽고 필사를 했다. 일요일은 브런치 연재를 하는 날이라 써 놓은 글을 다듬었다. 그리고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처음 집을 내놓았을 때 내가 봐둔 아파트는 두 달 새 6천이 올라 있었다. 정부가 주말에 대책을 내놓았지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집값을 확인하니 마음만 심란해졌다.
그래도 매일 습관처럼 하는 일이 있어 그래도 어수선한 마음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고민하고 걱정하는데 시간을 모두 뺏기지 않는다. '이런 정신 상태로 이게 무슨 소용이야' 싶은 마음에 책도 눈에 잘 안 들어오지만 그래도 마음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하려고 애써본다. 같은 페이지를 세 번씩 읽기도 했다. 뭔가 잡혀 있을 만 것이 필요하다. 집에 있으면 숨 막히고, 남편을 보면 답답하고,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하다. 냉장고를 열어보지만 아이들에게 뭘 해줘야 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장을 봐야 할 것 같아 가까운 마트에 가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안 따라간단다. 하는 수 없지. 혼자 마트에 갔다.
마트에 가는 길에 카페가 하나 있다. 전통차를 파는 조용한 카페. 거기 들어가 잠시 숨을 돌릴까 걸음을 멈추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집에 있기 싫어서 나오기는 했는데, 카페를 갈지 말지를 고민하다니. 그래도 육아휴직 할 때 남편과 싸운 날에는 갈 곳이 없었다. 혼자 집에서 울음 삼키며 답답함을 눌렀는데, 아이들이 좀 크니 한두 시간 자리를 비워도 불안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 집에는 방에 콕 처박혀 있는 늙은 애도 하나 있으니까. 카페 앞을 서성이다 내 발걸음은 결국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서 아이들이 적어준 쇼핑 리스트를 하나하나 담는다. 아이들의 과자를 찾다가 남편이 좋아하는 캐러멜 맛 팝콘이랑 빵부장도 고른다. 남편은 오늘 거의 밥을 안 먹은 것 같다. 꼴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챙겨주면 안 먹는 것보다 낫다. 사람은 배고프면 예민해진다. 설사 다른 곳에 정신이 빠져 있더라도 배고픔이라는 결핍은 사람의 사고 체계를 더 좁게 만드니까. 그 허기가 아이들을 향하면 안 되니까. 단 것을 입에 물려서 달래줘야 한다.
집에 와서 장본 것을 꺼냈다. 아이들은 간식을 꺼내먹고 남편도 슬그머니 나와서 과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초등학생 아이 둘과 오십넘은 사춘기 남편을 키우느라 내가 너무 고생한다.
이렇게 주말을 보내기 싫어서 단골 미용실을 예약했다. 이사 온 첫해에 발견한 미용실이다. 몇 달 전 미용실 사장님과 함께 술을 마신적이 있는데 말도 마음도 잘 통했다. 이번에는 첫째가 머리를 다듬고 싶다며 따라나섰다. 딸이 먼저 머리를 손질하고 다음으로 내가 염색을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이리저리 넘겨보니 새치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새치라기보다 흰머리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염색하러 오길 잘했다. 사장님과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문득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져서 딸에게 말했다.
- 엄마가 시간 오래 걸리는데, 먼저 집에 가 있어.
-싫어, 옆에 있을 거야.
-심심할 텐데 집에 가서 게임하는 건 어때?
-아니 나는 엄마 옆에 있는 게 더 좋아.
딸은 그렇게 한 시간 반동안 내 옆에 있었다. 평소에는 스마트폰에 빠져 내가 머리 하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오늘은 스마트폰 보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예쁘다는 둥 뽀뽀해 준다는 둥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 갈까 봐 집에 못 가는구나.'
예전에 미용실 사장님과 동네에서 술을 한 잔 할 때, 나는 가족들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이는 불안해서 울고 나는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데 왜 걱정하냐며 핀잔을 많이 줬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내가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맞다. 나는 사장님이 술 한잔 하러 가자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나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딸이 있어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좀 참았다. 만약 이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마시고, 울다 지쳐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상황이 좀 정리되고 내 마음도 안정을 찾으면 그때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사장님께는 조만간 파마하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6시 30분.
집에 오니 둘째가 말했다.
-엄마 배고파.
-아빠가 밥 안 챙겨줬어?
-응.
머리를 하고 집에 오자마자 나는 아이들 밥을 해서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남편은 그때까지 자기 방에서 한숨을 푹푹 쉬며 과자를 씹어먹고 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에게 씻으라고 했다. 아이들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남편의 굴에 들어가서 말했다.
-남편, 그리고 애들 눈치 보니까 한숨 좀 그만 쉬고 힘든 티 좀 내지 마. 지금 당신만 힘든 거 아니야. 나는 울고 싶은데 애들이 있어서 참는 거야. 집에서 울 수 없으니까 나가서 울고 오는 거라고.
남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일 출근할 거야 안 할 거야?
-출근해야지.
-알았어.
지난번처럼 출근 안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월요일에 나간다니 내일은 남편 집에서 숨 좀 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