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령이 물었다. 이 집이 니 집이냐? 음... 발령나면 말씀드릴게요.
언제 발령이 나는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아이 둘을 근거리에서 케어하려면 집과 학교가 가까워야 한다. 무엇보다 근무지가 나와야 내가 살 집을 고를 수 있는데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다. 우리처럼 한 달 만에 집을 이사해야 하는 사람이 이 동네에 몇이나 있을까.
2026년 1월 29일에 정부 대책이 나온 이후 주말에도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내가 점찍어둔 단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래도 월요일 아침에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점찍어둔 단지에 예산안의 급매물이 뜬 것을 발견했다. 가슴이 벅차다. 최고가였지만 그 가격에도 경쟁력이 있다고 느꼈다. 오전 11시, 지난번 연락처를 남기고 온 단지 내 부동산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 여보세요.
- 네 여기 **부동산이에요. 지난번에 37평 매물 보고 계시다고 연락처 남기셨죠?
- 네, 저도 아침에 급매물 나온 거 확인했습니다.
- 혹시 언제 집 보러 올 수 있으세요? 여기 물건이 요새 잘빠져서 빨리 오셨으면 좋겠는데.
- 그럼 내일 보러 가겠습니다. 내일 근무지 발표가 나거든요.
- 몇 시에 오실 수 있으세요?
- 오후 한시쯤 가겠습니다.
일단 내가 1 지망으로 지원한 지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장님께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일요일 밤에 온 눈이 화요일이 되어서도 녹지 않았다. 날이 따뜻하진 않았지만 바람이 약해서 아이들과 돌아다녀도 추울 것 같지 않았다. 오늘 발령지가 발표 난다고 했는데, 오전 내내 교육청 사이트에 들어가 새로고침을 눌러도 인사이동 공지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루 종일 새로고침을 하고 있을 수 없기에 간단히 짐을 싸서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남편이 출장을 가서 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마을버스-지하철-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가야한다. 아이들과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에 문득 약속시간이 한시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지금이 12시 50분이니까 시간이 촉박했다.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 사장님, 오늘 37평 매물 보러 가기로 한 사람인데요, 저희가 한시에 약속한 것 같은데 제가 제시간에 도착을 못할 것 같아요. 한시 반쯤 괜찮으세요?
- 아, 사모님. 제가 어제 연락드리고 집주인한테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어요. 전화 넣어 둘게요.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미리 연락 안 하고 가면 어찌 되었을지 가슴이 철렁했다. 집 보는 시간은 한시 반으로 잡혔다. 다행히 시간 여유가 생겨서 동네 조사도 할 겸 예전에 이용했던 역이 아니라 가까운 다른 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로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지도로는 알 수 없는 이 지역의 다른 동네를 관찰했다. 역시 지도로 보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또한 걷는 것과 로드뷰로 보는 것은 매우 다르다. 다른 역에 내려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한 탓인지 흥분한 탓인지 버스를 잘 못 내렸지만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보기로 한 아파트 입구 앞에서 부동산 사장님을 만났는데 마침 집주인도 아파트 입구에서 분리수거 하러 나오는 길이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37평이어서 상당히 넓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건이 가득해서 집이 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방 하나는 10자 옷장이 두개로 나뉘어져 들어가 있고, 방마다 행거에 옷이 즐비했다. 닳고 때가 타 반들거리는 나무 문지방은 집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작은방 천장의 등은 깨져 있고, 교체하지 않은 낡은 섀시 사이로 찬바람이 세게 드는지 뒷베란다 창문을 커다란 비닐로 막고 있었다. 테이프로 엉성하게 붙여둔 비닐은 바람이 불 때마다 숨을 쉬듯 부풀었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앞 베란다 바닥에는 매트 위에 이불이 깔려있고, 작은 소파와 함께 수많은 인형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밖에 아이들 짐이 베란다에 쌓여 있어 문 여닫고 소파에 앉는 것 외에는 베란다에서 할 수 있는게 없다. 벽지는 누렇고 버튼마다 빛바랜 고양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 여기는 섀시가 그대로네요. 한 번도 리모델링을 안 했나요?
- 작은방을 확장했고, 부엌 싱크대도 한번 바꾼 거예요. 외부 섀시는 그대로지만 베란다가 있어 실내는 춥지 않고요.
- 아이가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충격적인 벽지 상태를 에둘러 말했다. 10분정도 집을 본 후 엘리베이터 1층에 내려와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사장님과 아파트 입구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배고픈 아이들에게 과일주스를 챙겨주셨다. 아이들의 아우성이 잠잠해진 후 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저분들이 집주인이 아니에요. 집주인은 서울에 사는데 지난주에 다주택자 양도세 소식을 듣고 내놓은 거예요. 그래서 5월 8일까지 잔금 마감되어야 조건이 붙은 물건이고요.
- 아 집주인이 아니시구나.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 살 수도 있는데 집상태가 너무 나쁜데요? 저 정도 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청소 상태는 둘째 치더라도 벽지에 스티커를 보니 도배도 해야 할 것 같고, 등도 깨진 게 있어서 다시 달아야 할 것 같아요. 장판은 말할 것도 없고, 뒷베란다는 바람이 들어오는걸 보니 겨울에 빨래를 편하게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격은 조정 가능할까요?
- 2주 전에 500만 원 싸게 나온 매물은 이 집보다 상태가 더 나빴어요. 거긴 싱크대도 자주색에다 벽지가 다 떨어진 상태 그대로 거래된 거거든요. 그래도 이 집은 싱크대를 바꾸고 방 하나를 확장해 놔서 그 집보단 나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집에 계속 살고 싶어 해요. 애가 셋이라 방 4칸짜리 집이 필요한 데다 아이들이 요 앞에 학교를 다니는데 웬만하면 아이 모두 졸업하고 나가고 싶어 하지 중간에 전학 가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이 사람들 전셋값이 3억 7천5백인데 5월에 재계약하면서 전셋값을 좀 올리고, 갭으로 사놓는 것도 좋아요. 일단 매물이 없는 데다 수리된 집은 8억 넘게 불러서 가격적인 메리트가 떨어지니까.
- 그러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가 아직 어느 학교로 발령이 날지 몰라서 그거 발표되면 저희가 들어와 살든지 아니면 갭으로 사놓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주에 제 근무지가 확정되면 그때 바로 와서 말씀드릴게요. 저랑 남편이 어젯밤에 계속 이야기해 봤는데 이 단지가 가장 마음에 든다는 것에 합의를 했기 때문에 다른 곳은 일단 보지 않았어요. 이번 주 말까지 매도 안되서 저희가 가져가면 좋겠어요.
- 결정 나면 바로 연락 주세요. 이 가격에 이 평수 매물이 이것밖에 없어서 빨리 나갈 거예요.
- 네 알겠습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부동산을 나왔다. 아이들과 천천히 아파트 샛길을 걸어 학원가로 나온다. 지도상으로 꽤 멀어 보였는데 천천히 10분 정도 걸으면 학원가와 상가가 나왔다. 아이들은 햄버거를 먹겠다고 해서 가까운 매장에 들어가 원하는 메뉴를 하나씩 시켰다.
그때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 야, 축하해. 방금 떴다. 너 일단 우리 동네로 입성하는 건 통과했어.
- 고맙다. 다행이네. 지금 너희 동네 근처야. 오전 내내 새로고침 하다가 나왔는데 급매물이 있어서 바로 나왔는데, 집 하나보고 이제 늦게 점심 먹는다. 집에 가서 명단 확인해 봐야겠네.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 부동산을 한 곳 더 가고 싶었지만 아이들 학원 시간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근처 다른 아파트는 11월 초쯤 갔을 때 운좋게 매물을 몇 개 보고 왔기 때문에 구조는 대략 알고 있었고, 다시 가서 확인할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나는 1 지망으로 쓴 행정구역에 발령이 나는 건 성공했다. 나는 작년 발령 커트라인보다 점수가 월등히 높아서 당연히 지역 배정은 통과할 거라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동네다. 내가 살 아파트 근처 학교로 발령이 안 나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아파트보다 학교 발령이 우선이다. 그리고 나는 직주근접이어야 한다. 이왕이면 도보로. 아이 둘 돌보며 출퇴근하기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와 가까운 정류장에서 역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비싼 대단지-앞서 내게 전화를 해 준 친구가 사는- 아파트를 한 바퀴 빙 돌아간다.
버스를 타고 역으로 가면서 높고 웅장한 대단지 아파트를 본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집이 있는데 내 집이 한 칸 없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아파트 정문에서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가게 안에서 여유롭게 식사하는 사람들 모두 행복해 보인다. 나도 근무지가 정해지고 내가 살 곳이 결정되면 저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나 말고 다른 사람 모두가 집 가진 사람들이나 살 집이 있는 사람들처럼 보여 혼자 초라해졌다.
이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아이 둘은 버스에서도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 잘 되겠지. 앞으로 어찌 될지 누가 알겠어. 혹시 날짜가 어긋나면 이삿짐센터에 짐 맡겨놓고 호텔에 며칠 살든지 아니면 단기임대 찾아서 잠깐 들어가 살면서 집이나 고치지 뭐.
우울한 생각은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아이들과 지하철로 갈아탔다. 앉아갈 순 없었지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치며 샐샐거린다. 나의 걱정이 너희들에게 드리워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엄마가 잘해 볼 테니 너희들은 이런 걱정일랑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살거라.